22일 일본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린 야스쿠니신사 무단 합사 철폐 소송 최후변론에 나온 유수예(가운데)씨가 진술을 마치고 아버지 사진을 들고 서있다.
“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기 하루 전날 동원됐습니다. 만삭의 아내를 두고 곧 태어날 자식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전쟁터로 끌려간 아버지를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그 뒤에 아버지로부터 갓 태어난 제 사진을 보내달라는 편지가 왔다고 합니다. ‘보고 싶으니 사진이라도 찍어서 보내주었으면 한다. 며칠만 늦게 왔어도 아들 얼굴이라도 보고 왔을 텐데…’라고 써 있었다고 합니다.”
22일 오후 일본 도쿄의 도쿄지방재판소 103호 대법정에서는 ‘야스쿠니신사 무단 합사 철폐 소송’의 최후변론이 진행됐다. 소송을 낸 유족 27명을 대표해 유수예(74)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최후진술을 했다.
유씨는 아버지가 23살 때 끌려갔다고 했다. 아버지 유봉학씨는 1945년 1월 가고시마현 해군기지 군속으로 동원돼 해방을 20일도 남기지 않은 그해 7월28일 미군의 폭격으로 숨졌다. 외아들인 아버지가 끌려간 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할머니, 어머니, 유씨는 배급에 의지해 겨우 연명했다고 한다. 해방 뒤 함께 동원됐던 마을 사람이 돌아와 아버지가 숨졌다는 것을 알려줬고, 할머니는 충격으로 한 달 뒤 세상을 등졌다.
유씨는 “전사통지서를 받은 적도 없다. (일본 정부가 작성한) 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유골을 가족에게 돌려줬다고 했지만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유씨는 구두닦이와 껌 장사를 하며 어렵게 살았다. “너무 살기 어려워” 극단적인 생각도 품었다고 했다.
유씨는 전쟁의 피해자인 아버지의 이름이 야스쿠니신사에 남아 있는 점을 참을 수 없다고 했다. “아버지를 전쟁터에 끌고가 비참하게 죽게 하고 무단으로 합사한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는 저에게 사죄하고 보상해야 합니다. 하루빨리 야스쿠니에서 아버지 이름을 빼야 합니다.”
1869년 설립된 야스쿠니신사에는 청일전쟁·러일전쟁·태평양전쟁 전사자들, 태평양전쟁을 주도한 A급 전범 등이 합사돼 있다. 조선 의병을 토벌하다 숨진 군인들도 합사돼 있다. 전쟁터에 끌려가 숨진 뒤 합사된 조선인도 2만명이 넘는다.
이 때문에 유족들이 2007년 1차 무단 합사 철폐 소송을 야스쿠니와 일본 정부를 상대로 냈으나 2013년 패소했다. 원고 쪽은 일본 정부가 전후 형식상 종교법인으로 변신한 야스쿠니에 전사자 명부를 제공한 점 등을 추궁했으나, 재판부는 정부가 야스쿠니를 적극 보호하려는 의도나 목적은 없었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이후 다른 유족이 2013년 도쿄지방재판소에 2차 소송을 냈고, 이번에 최후변론이 진행됐다. 판결은 5월에 나올 예정이다.
변호인단은 법정에서 “전몰자 추도는 다른 나라에서도 하는 일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야스쿠니는 침략 전쟁을 긍정하는 시설이기 때문에 성격이 다르다. 8월15일 부도칸에서 일본 정부가 하는 전몰자 추모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나라는 없다”며 “일본 정부는 전사자 명부를 야스쿠니에 제공한 것이 행정 서비스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 “입장을 바꿔 일본이 한국에 병합된 뒤 일본인이 전쟁터로 끌려가 전사했다고 가정해보자. 한국 마음대로 일본인을 종교시설에 합사한다고 생각하면 받아들일 수 있나. 종교의 자유라고 주장할 수 있나”라고 따졌다.
도쿄/글·사진 조기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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