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27일 히로히토 일왕이 도쿄의 미국대사관을 방문해 맥아더 더글라스 맥아더 미군사령관을 만난 장면. <한겨레> 자료 사진
히로히토 일왕이 태평양 전쟁 패전 뒤 일본 ‘평화 헌법’ 개정과 재군비가 필요하다는 발언을 했다는 자료가 새로 발견됐다.
일본 <엔에이치케이>(NHK) 방송은 초대 궁내청(왕실 담당 부처) 장관 다지마 미치지가 1949년 2월부터 1953년 12월까지 600차례 300시간 이상 히로히토와 대화한 기록을 남긴 ‘배알기’에서 이런 내용이 확인됐다고 18일 전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히로히토 일왕은 일본이 미국·영국 등 연합국과 패전 처리를 위해 맺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5개월 만인 1952년 2월 “나는 헌법개정에 편승해 밖에서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해 부정적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부분은 다루지 않고 군비에 대해서만 공명정대하게 당당히 개정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히로히토 일왕은 같은 해 5월에 “나는 재군비로 옛 군벌(2차대전 패전 이전 일본의 군벌)이 다시 대두하는 것은 절대 싫지만 침략을 받을 위협이 있는 이상 방위적인 새로운 군비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히로히토 일왕은 2차 대전 당시 일본군 최고 통수권자였지만, 1948년 태평양전쟁 일본전범을 단죄한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 전쟁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았다. 일왕은 패전 1년 뒤인 1946년 1월 스스로 ‘인간 선언’을 했고, 같은해 11월에는 전쟁 포기와 군대 보유 금지를 규정해 ‘평화헌법’으로 불리는 현행 일본국 헌법이 공포됐다. 일왕은 전쟁 책임 추궁에서 벗어난 지 불과 4년 만에 재군비를 주장한 것이다.
히로히토 일왕은 평화헌법 개정과 재군비 필요성을 당시 총리였던 요시다 시게루에게 전달하려고 했으나, 다지마 장관이 말리는 장면도 나온다. 1952년 3월 히로히토는 “경찰도 의사도 병원도 없는 세상이 이상적이지만, 병이 있는 이상 의사가 필요하고 난폭하게 구는 사람이 있는 이상 경찰도 필요하다. 침략자가 없는 세상이면 무장이 필요하지 않겠지만 침략이 인간 사회에 있는 이상 군대는 부득이하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다미자 장관은 “말씀하신 그대로이지만, 헌법상 그런 것은 말할 수 없으며 최근 전쟁에서 일본이 침략자라고 불린 직후이기도 하다. 이는(헌법개정과 재군비 주장은) 금지된 말이다”고 대답했다.
도쿄/조기원 특파원
garde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