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 <한겨레> 자료사진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고령이라 시간이 많지 않다. 피고 기업의 사과를 전제로 배상에 대한 재원 문제는 조금 열어놓고 논의하면 어떨까 싶다.”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는 12일 <한겨레>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현재 한-일 관계 최대 쟁점인 일본 강제동원 배상 문제와 관련해 “역사적 정의, 정치적 현실, 사법적 절차를 만족시키는 구체적인 안을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남 교수는 “2015년 유네스코에서 일본 정부는 사실상 강제노동을 인정하고, 진지하게 대응하겠다고 국제적으로 표명했다”며 “이런 연장선에서 일본 기업이 사과할 수 있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남 교수는 일본 정치와 외교, 국제정치 전문가로 일본의 대표적 진보 지식인인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의 제자다.
―우리 법원의 압류명령 결정에 대해 일본제철이 즉시항고를 했다. 그동안 무대응으로 일관하다가 처음으로 움직인 것인데.
“일본제철이 한국의 사법 절차 안으로 들어왔다는 의미는 있지만 현금화까지는 시간이 더 많이 걸릴 것이다. 일본도 현금화 프로세스에 들어갈 경우 보복에 나서야 하는데 부담스럽다는 판단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시간을 끌겠다는 것인데, 고령인 피해자들에겐 더 답답한 상황이 됐다.”
―돌이켜보면 피고 기업이 한국 대법원 판결에 따라 배상을 했으면 되는 문제였다. 일본 정부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이유로 개입하면서 논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표면적으로는 강제동원 피해자 줄소송이 이어질 수 있으니 기업을 보호한다는 명분이 작용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아베 신조 정권의 국가전략이 영향을 줬다고 본다. 중국의 군사적 대두, 북한의 핵미사일 고도화 속에서 일본은 미-일 동맹에 더욱 매달렸다. 기본적으로 중국, 북한, 러시아의 위협 속에서 미국과 함께 국제적 리더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 일본 전략이고 한국이 따라오기를 원했다.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강제동원 배상 대법원 판결을 통해 한-일 관계가 틀어지고, 문재인 정부 들어 남북 화해 협력이 적극 추진되면서 한·미·일이 함께 가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 같다. 한국을 배제하면서 미-일 동맹에 더 매달리게 되었고, 미-일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한국이 배제되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본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강제동원 판결에 따른 현금화가 실행되면 한-일이 ‘보복 대 보복’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
“현금화에 대한 일본의 보복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해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때만 하더라도 도쿄올림픽 등 경제적 반등 요소가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일본이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에 대한 경제 조치까지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또 대놓고 보복하면 국제사회를 설득하기 힘들다.”
―한-일 관계는 역사와 경제, 안보까지 바로 연결돼 있어 여파가 크다. 최근 일본은 ‘적기지 공격능력’ 보유를 추진하면서 “한국, 중국의 양해가 왜 필요하냐”는 발언까지 했다.
“일본 정부가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한번만 읽어봤어도 이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시 공동선언은 일본이 한국의 민주화를, 한국이 일본의 평화주의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 거기엔 ‘일본이 평화헌법 하에서 전수방위 및 비핵 3원칙 유지’라는 내용이 명확히 적혀 있다. 적기지 공격능력을 갖겠다는 것은 전수방위 원칙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이 선언은 한쪽의 담화가 아닌 국가 대 국가, 국민 대 국민의 약속이자, 한일이 공유하는 정신이다. 이를 변경하겠다면 한국에 반드시 설명을 해야 한다.”
―솔직히 한-일 관계를 꼭 개선할 필요가 있느냐는 여론도 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미-중 갈등은 격화되는 한편, 두 강대국이 지도력을 상실하는 등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 미-중이 혼란 속에 있기 때문에 앞으로 더 난폭해질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이는 오히려 중견국들이 새로운 국제 질서를 만들 수 있는 기회라고 본다. 초강대국을 상대로 비슷한 국가들이 모여 어젠다와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 중견국 외교다. 한국이 일본을 배제하고 중견국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중견국을 상대로 한 네트워크 구축에 일본이 앞서 나가 있기 때문이다. 또 대북제재 해제와 남북경협의 본격적인 추진을 위해서도 한-일 관계는 중요하다.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외교력이 아직은 건재하기 때문이다. 미국 워싱턴의 주류는 물론 독일, 프랑스, 영국 등과 구축해온 전통적인 협력관계를 통해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를 강화하는 등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방해할 수 있다는 얘기다.”
―강제동원 문제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는 많다. 하지만 한국의 피해자와 일본 정부를 모두 만족시킬 만한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인다.
“피해자가 고령이라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길을 찾아야 한다. 역사적 정의 차원에서 일단 피고 기업(일본제철)이 피해자들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2015년 일본 정부의 유네스코 발언을 볼 필요가 있다. 군함도 등 일본의 근대산업시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당시 일본 정부는 조선인과 여타 국민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동원돼(brought against their will) 강제로 노역했다(forced to work)’는 사실을 이해한다며 진지하게 대응하겠다고 국제적 약속을 했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피고 기업이 피해자들에게 사과할 수 있도록 일본 정부가 문을 열어줘야 한다. 일본 기업의 사과를 조건으로 배상에 대한 재원은 조금 열어놓고 논의를 하면 어떨까 싶다. 예를 들어 ‘원고-피고 화해’라는 사법적 절차의 마지막 단계에서 (재원을 모을 수 있는) 재단이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지급하고, 피고 기업은 화해의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재단에 합류해 기여하는 방식도 생각해볼 수 있다.”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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