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출판시장은 여전히 문학과 경제·경영, 자기계발서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지만, 최근 인물 평전 같은 논픽션 장르의 약진이 또렷한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다.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의 여성서적 판매대에 진열된 자기계발서들. 한겨레 박미향
한겨레21
[기획] 전기문학 불모지 한국에서 독립 장르로 발전하는 평전… 전문적 연구와 대중적 글쓰기로 무장한 ‘작가’의 출현이 과제
여전히 낯설다. 인물 비평에 조심스러운 한국이기에 더욱 그렇다. 엄정한 평가를 시도한다며 인간적 그늘을 들춰냈다 유족이나 문중의 항의를 받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2006년에 나온 <조영래 평전>이 그랬다. 게다가 허구와 사실의 경계가 불분명한 ‘팩션’(fact+fiction)과 달리, 평전은 전달자의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상대적으로 좁다. 독자가 무겁고 건조하다고 느끼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불멸의 이순신> 같은 TV 사극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정작 서점의 진열대 앞에선 이순신의 평전을 뽑아드는 데 인색하다.
출판시장 지각변동의 징후?
평전은 넓은 의미의 전기에 속하지만, 집필자의 평론이 부가된다는 점에서 통상의 전기와 구별된다. 비평적 전기문학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에 최근 변화의 기운이 감지되고 있다. 평전이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평전이란 표제를 달고 출간되는 책이 해마다 증가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지난해 국내에선 47권의 평전이 출간됐다(교보문고 등재 기준). 2009년 41권, 2008년 25권과 비교하면 증가세가 뚜렷하다. 2010년 12월에 나온 <리영희 평전>(책보세)은 교보문고 1월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정치·사회 분야 18위에 등재되기도 했다. 대단한 선전이다.
약진은 올해도 이어지고 있다. 5개월 새 20권이 출간됐다. 노동자 배달호,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대학생 강경대·조성만 등 묻혀 있던 인물들의 평전이 줄을 잇는 것도 주목되는 지점이다. 지난 5월엔 한겨레출판이 100권짜리 평전 시리즈를 시작했다. 출판계에 일으킨 파문이 예사롭지 않다. 1차분으로 이완용·최남선·안중근을 출간했고, 정인보· 유길준·김옥균·신채호 등 근대 인물과 김인후·조광조·남곤·김종직·유자광·서거정 등 조선시대 인물의 평전이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이완용 평전>(한겨레출판)은 출간 1주 만에 교보문고 주간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역사·문화 분야 6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평전의 약진을 두고, 일각에선 출판시장의 지각 변화를 예고하는 징후로 해석하기도 한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평전이 절실해질 만큼 출판시장이 충분히 성숙해진 것은 아니지만, 외국의 주요 평전들이 속속 출간되면서 시장성을 늘려가는 것을 보면, 평전의 필요성만큼은 모두가 공감할 정도는 된 게 확실하다”고 진단한다. 도서평론가 이권우씨의 견해도 다르지 않다. “여전히 문학이나 이야기에 대한 독자들의 애착이 강하지만, 외국의 추세나 국내 출판계의 여러 조짐을 보면 국내 출판시장도 논픽션이나 다큐멘터리 쪽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게 돼 있다”는 것이다. 그는 평전에 대한 개념조차 자리잡지 못했던 1980~90년대에 <전태일 평전>이나 혁명가 김산의 일대기를 다룬 <아리랑>이 폭발적 반응을 얻은 사실을 눈여겨볼 것을 주문한다. 평전에 대한 사회적 갈망은 ‘성찰적 독자층’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존재해왔으나 그들의 욕망과 수요를 충족시켜줄 양질의 평전이 생산되지 않아 시장이 커지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 한국의 평전 출판시장은 시장이라 부르기가 민망할 만큼 규모가 왜소했다. 그마저도 팔린 책들은 외국 번역서가 대부분이었다. 지난해 출간된 책들 중에도 국내 인물을 다룬 것은 40%가 채 되지 않는다. 시기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외서 편중’이 두드러진다. 이 점은 국회도서관의 소장 도서 목록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목록을 보면 평전이란 이름을 단 인물 전기가 본격적으로 입고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다. <이태백 평전>(을유문화사·1971)을 필두로 <토크빌 평전>(을유문화사·1973), <괴테 평전>(삼성문화재단·1974), <소크라테스 평전>(삼성문화재단·1974), <헤밍웨이 평전>(을유문화사·1974), <스탕달 평전>(정음사·1976), <보들레르 평전>(문학과지성사·1977), <조이스 평전>(정음사·1977), <조조 평전>(제5문화사·1978)이 나왔다. 이 시기에 출간된 국내 인물에 대한 평전은 고은 시인이 쓴 <한용운 평전>(민음사·1975)이 유일하다. 국내 인물 평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959년 자유춘추사가 펴낸 <이기붕 평전>이지만, 당대 최고 권력자의 전기를, 그것도 1960년 정·부통령 선거를 한 해 앞두고 펴낸 정황 등으로 미루어 ‘홍보용 팸플릿’의 혐의가 짙다.
기념비적 전기 <전태일 평전>
외국인 평전의 우세는 198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장제스(1980), 마치니(1980), 드골(1981), T. S. 엘리엇(1981), 카프카(1981) 등 외국 정치인과 작가들의 평전이 잇따라 출간됐다. 이 시기 국내 인물에 관한 평전은 김소월(1981), 윤동주(1981), 이상화(1981) 등 시인들의 전집 출간에 맞춰 간행된 짧은 ‘약전’이 주류를 이뤘다. 사전 검열과 등록 취소, 도서 압류가 횡행하던 출판의 암흑기였다는 점과 무관치 않다. 그래도 한국 출판사에 획을 긋는 기념비적 저작이 나온 것도 이 즈음이다. 조영래 변호사가 쓴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돌베개)이다. 1983년 초판이 출간된 이 책은 지금까지 50만 부 넘게 팔렸다.
1990년대 들어선 1987년 민주화의 분위기를 타고 좌파 정치인과 혁명가, 사회운동가들의 삶이 복원되기 시작했다. 1988년 김산의 전기 <아리랑>(동녘)을 통해 처음 시도된 ‘혁명가 평전’은 인민혁명당(인혁당) 사형수 이수병(1992),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1995), 좌익 독립운동가 여운형(1995), 동학농민전쟁 지도자 전봉준(1996), 아나키스트 박열(1996), 민주화 열사 박종철(1998) 등의 평전으로 이어졌다. 반공규율 사회의 제도적 억압 아래 오랜 기간 내면화된 자기검열 기제가 완화되면서 현대사 인물에 대한 소개와 평가가 비로소 가능해진 덕분이었다.
2000년 출간된 <체 게바라 평전>(실천문학사)은 평전도 ‘문화 상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획기적 저작이었다. 파격적인 붉은색 양장에 판형을 줄여 페이지 수를 늘린 이 책은 일단 예뻤다. 당시 대학생 사이에서 ‘팬시 상품’처럼 팔려나갔는데, 여기엔 1997년 떠들썩하게 진행된 체 게바라의 30주기 이벤트와 랩 메탈 밴드 RATM을 통해 조성된 ‘체 붐’의 후광 효과도 일정하게 작용했다. 체 게바라 평전을 계기로 1990년대에 거의 자취를 감췄던 외국인 평전들이 활발하게 출간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2001), 호찌민(2001), 마오쩌둥(2002), 조지 오웰(2003), 저우언라이(2004), 스콧 니어링(2004), 레이철 카슨(2004), 미테랑(2006), 존 리드(2007), 윌리엄 모리스(2007), 레닌(2009), 엥겔스(2010) 등의 삶과 사상을 조명한 대작들이 잇따라 독자를 만났다.
2000년대에 두드러진 또 다른 현상은 이념적 제약 탓에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국내 인물들의 평전 작업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점이다. 도서출판 시대의창과 실천문학사가 주도한 현대사 인물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2004년 <백범 김구 평전>으로 평전 기획을 시작한 시대의창은 김창숙(2005), 신채호(2005), 장준하(2009), 조봉암(2010) 등 민족주의자들의 평전을 주로 냈다. 실천문학사는 ‘역사인물찾기’ 시리즈를 통해 여운형(2004), 김원봉(2005), 김산(2006), 이현상(2007), 김학철(2007), 박헌영(2009) 등 사회주의 계열 혁명가들의 삶을 복원하는 데 주력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소설가 안재성이 쓴 <이현상 평전>이다. 쇄를 거듭하며 1만 부가 넘게 나갔다. 나머지 책들도 대부분 3천~5천 부씩 시장에서 소화됐다. 김혜선 실천문학사 편집부장은 “과연 이 책을 누가 볼까 싶었던 880쪽짜리 <폴 포트 평전>이 5천 부 넘게 팔렸다”며 “장르적 충성도가 높은 마니아 독자층이 존재한다는 방증”이라고 했다.
잠재성을 소비로 연결시킬 ‘수준’이 문제
평전 시장의 잠재성을 높게 보는 쪽에선 한국의 유구한 서사적 전통에 주목한다. 역사학자 이이화씨는 “전(傳)과 행장(行狀) 등 인물의 행적을 기록한 서사 장르가 민간에 보편화됐고, <삼국사기>나 <고려사> 같은 사서에도 인물의 생몰과 언행, 행적을 담은 열전이 풍부하게 수록돼 있다”며 “일찍부터 한국인의 문화적 DNA 안에는 평전과 전기문학에 대한 관심이 자리잡고 있었던 셈”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졸기’(卒記)를 평전의 원형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졸기는 공직에 몸담았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고인의 가계와 행적, 시호, 자손 관계와 함께 사관(史官)의 평결을 담아 적은 일종의 ‘약식 평전’으로, 실록에 2100편이 실려 있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는 “인물에 대한 찬사가 주조인 전·행장과 달리, 졸기에선 인물의 공과와 장단을 냉정하게 평결해 기록을 남겼다”며 “통념과 달리 ‘비평적 전기’라는 평전 형식은 우리의 기록문화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온 전통”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수요의 잠재성을 현실의 소비로 연결시킬 ‘상품’의 수준이다. 출판평론가 변정수씨는 ‘작가군의 부재’를 평전 시장의 확대를 가로막는 주요 걸림돌로 꼽는다. “인물과 사건의 맥락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객관적 거리 유지가 어렵고, 거리 유지가 가능한 사람들은 맥락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게 이유다. 한기호 소장의 지적도 비슷하다. “제대로 만들기만 하면 팔리는데, 제대로 쓸 실력 있는 작가가 부족하다 보니 잘 읽히는 평전을 만들기 어렵다.”
실제 미국이나 일본, 유럽에선 전문적인 논픽션 작가들이 평전을 주로 쓰는 데 반해, 국내에선 역사학자나 저널리스트, 소설가들이 부업 삼아 쓰는 경우가 잦다. 논픽션 작가군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현실과도 관련이 깊은데, 변정수씨는 그 이유를 평전 작가집단을 수용할 매체가 부족한 데서 찾는다. 장문의 원고를 소화할 월간지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다 보니 글재주를 가진 인재들이 전문작가로 성장할 기회를 잡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권우씨는 대안으로 저널리스트들의 분발을 촉구한다. “역사학자들은 딱딱한 논문적 글쓰기 방식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소설가들은 사료에 대한 평가와 검증 능력이 취약하다. 평전이야말로 취재와 자료 분석, 대중적 글쓰기 능력을 두루 갖춘 언론인들이 가장 잘 쓸 수 있는 분야다.”
하지만 ‘비평적 역사서’로서 평전의 기능에 주목하는 쪽에선 전문학자들의 구실을 강조한다. 좋은 평전은 오랜 연구 결과가 축적된 안목과 학식 위에서야 나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도서출판 책보세의 김이수 주간은 “가장 탁월한 <마르크스 평전>(미다스북스)의 저자는 영국의 정치철학자 아이자이어(이사야) 벌린”이라며 “우리나라도 역사학자, 철학자, 정치학자, 사회학자들이 평전 집필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20세기 ‘3대 전기작가’의 한 명으로 꼽히는 슈테판 츠바이크는 철학박사 학위를 가진 전문학자였다. 역사학자 E. H. 카도 <도스토옙스키 평전>(열린책들)을 썼고, 현존하는 프랑스 최고의 지성 자크 아탈리는 <마르크스 평전>(예담)과 <미테랑 평전>(뷰스)을 남겼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외국인 평전의 우세는 198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장제스(1980), 마치니(1980), 드골(1981), T. S. 엘리엇(1981), 카프카(1981) 등 외국 정치인과 작가들의 평전이 잇따라 출간됐다. 이 시기 국내 인물에 관한 평전은 김소월(1981), 윤동주(1981), 이상화(1981) 등 시인들의 전집 출간에 맞춰 간행된 짧은 ‘약전’이 주류를 이뤘다. 사전 검열과 등록 취소, 도서 압류가 횡행하던 출판의 암흑기였다는 점과 무관치 않다. 그래도 한국 출판사에 획을 긋는 기념비적 저작이 나온 것도 이 즈음이다. 조영래 변호사가 쓴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돌베개)이다. 1983년 초판이 출간된 이 책은 지금까지 50만 부 넘게 팔렸다.
» 대중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평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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