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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냐면

현장실습 폐지: 노동착취 대신 직업교육 정상화 시급

등록 2021-11-03 17:53수정 2021-11-04 15:09

[왜냐면] 김경엽|전교조 직업교육위원장

사회의 수준을 판단하는 지표가 있다. 그 사회가 가진 제도로 인해 한 생명이 희생되었을 때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고 대책을 마련하여 같은 비극이 더는 반복되지 않도록 실행하는 실력, 그것이 곧 그 사회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지표일 것이며 살아남은 자가 죽은 자에게 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한달 전 홍정운 학생의 사망 사고는 우리 사회가 여전히 성숙하지 못한 사회임을 증명했다.

학생의 죽음을 무겁게 바라본다. 노동의 위계에서 가장 밑바닥을 떠받치고 있는 열여덟살 현장실습생이기에 더더욱 안전에 철저해야 했다. 과거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취업률로 예산 주고 1학기부터 실습하도록 규제를 완화한 결과, 학생들의 사고가 많았다. 특히 2017년에는 전주, 부산, 여수, 안산, 제주까지 전국 곳곳에서 사고가 이어졌다.

교육부는 조기 취업 현장실습 폐지의 약속을 어기고, 2018년 2월 허울뿐인 ‘학습중심 현장실습’ 정책을 발표했다. 업체의 질은 여전히 떨어지고, 학생들이 현장실습을 중도 포기하고 학교로 되돌아오는 비율이 높아졌다. 현 교육부 장관은 2019년 1월과 2020년 5월에 실습 기간을 늘리고 기업 참여 조건을 완화하는 발표를 했다. 일련의 발표로 직업계고(특성화고)의 현장실습은 학습이 아닌 조기 취업, 불법 노동이 되었다. 노동자는 고용노동부에서 보호해야 하지만 노동부 관계자는 현장실습 업체가 노동부의 관리감독 대상이라는 기초적인 사실도 모르고 있다. 애초에 안전한 현장실습을 기대할 수 없다.

생산력 유지를 위한 직업훈련 체제는 필요하다. 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노동시간이 가장 길고 별도의 훈련 시설을 갖춘 기업의 비율이 고작 1%인 우리나라 노동현장의 지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현장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부족하고 학생은 사전교육도 없이 생산시설에 투입된다.

현장실습 업체 가운데 30인 미만 사업장이 36.7%, 300인 이상 사업장도 23.3%를 차지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36.7%에 해당하는 중소 사업장은 현장실습을 운영할 역량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단기 노동력 공급 통로로 현장실습을 악용해왔다. 대기업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다. 대기업의 산업기술은 표준화에 이어 자동화로 변화해 가고 있다. 학생들이 주로 배치되는 대기업의 생산노동은 종합 노동이 아니라 부분 노동이다. 대기업에서 이루어지는 현장실습은 학습이기보다 생산노동이며, 장기적 관점으로 볼 때 단순 생산노동은 선진 기술력을 보장할 수 없다. 결국 지금까지 운영한 현장실습은 취업을 가장한 노동 착취 제도이고, 기업은 안전한 실습 환경을 제공하기보다 쉽게 쓰고 쉽게 버릴 수 있는 일손이 필요했을 뿐이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금까지 현장실습은 학생에게 취업 전 직무를 경험할 기회를 제공하지 못했다. 교육당국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홍정운 학생이 숨졌고, 현장실습 시한폭탄은 또다시 작동하게 될 것이다. 교육받기 위해 현장에 나간 학생들의 생명과 일그러진 직업교육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이어가고 있다. 현장실습은 이제라도 폐지되어야 마땅하고, 직업교육을 정상화하고 고등학교 졸업 예정자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보장하는 방안을 마련할 때다. 이는 전체 산업재해를 감소시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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