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윤 ㅣ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정책실장
20년 전 6월13일 아침은 생각보다 고요했다. 온 국민은 우려 섞인 기대 속에 학교로 직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 복잡한 감정이 환호와 감동으로 바뀌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평양 순안공항,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분단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손을 잡았다. 서로 적이었던 두 정상은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담화했고, 악이었던 상대는 이웃이 되어 우리 옆에 다가왔다. 지금은 아이들의 역사 교과서에도 담겨 있는 세계사의 명장면이다. 분단 역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은 ‘분단과 대결’에서 ‘화해와 협력의 시대’로 역사의 대전환을 만들었다.
2년 전 4월27일. 분단의 상징 판문점에 선 남북 정상은 어렵게 만든 남북 합의가 멈추거나 거꾸로 갔음을 성찰했다. “우리는 결코 뒤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역대 합의처럼 시작만 뗀 불미스러운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해 6월 역사상 처음으로 북·미 정상이 싱가포르에서 만났다. 그날 성조기와 인공기의 의외의 조화 속에 ‘동맹’은 그렇게 ‘적’과 만나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이야기했다. 9월에는 평양 시민 앞에 문재인 대통령이 섰다. 대통령은 “우리는 5천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다”며 70년 적대를 완전히 청산하자 연설했다. 이날 남녘과 북녘 동포의 감정이 달랐을까. 아무리 어려워도 남북이 힘을 합치면 못할 것이 없다는 확신은 새로운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 되었다. 청년들은 부산에서 열차 타고 파리에 닿는 꿈을 꿨고, 기업인들은 다시 평화경제를 설계했다. 남북은 사실상 불가침선언인 군사합의서에 서명했다. ‘평화와 번영의 시대’로의 역사적 전환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남북관계는 위기에 처해 있다. 대북전단 문제를 발단으로 북은 연일 강경 입장을 쏟아내고 있다. 어렵게 쌓아올린 남북 합의에 균열이 가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계속되는 북의 군중집회에 주목해 보자. 자기 지도자에 대한 폄훼는 북에 있어서는 전쟁과 다를 바 없다. 이해 여부를 떠나 이건 현실이다. 남북의 합의 이행은 어떠한가. 우리 정부는 남북관계 발전보다 북-미 관계 진전에 지나치게 기댔고, 북-미 관계가 삐걱대면서 남북협력은 미국을 넘어서지 못했다. 불과 2년 전 평양 시민 앞에서 연설한 남녘 지도자에 대한 배신감도 있을 것이다.
합의도 이행하지 못하면서 대화만 제안하는 것은 오히려 불신을 부추긴다. 사업을 제안하고 호응만을 기다리는 기능적 접근은 버려야 한다. 지금의 위기는 신뢰의 위기이다. 우회로는 없다. 현재 꽉 막힌 남북관계를 풀기 위해서는 무너진 신뢰를 다시 만드는 데 주력해야 한다. 그 신뢰회복의 해답은 이벤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 합의의 성실한 실천에 있다. 국제 환경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남북 합의 이행을 위해 최대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상호 적대적 행동이나 언사를 모두 중단하고 군사행동이나 대북전단 살포 등 합의에 역행하는 적대적 행동도 막아야 한다. 나아가 개성공단 및 금강산관광 정상화, 철도 및 도로 연결, 군축으로의 지향 등 남북 합의 사항을 한걸음이라도 더 과감히 진전시켜야 한다.
지금 세계는 코로나 이후의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는 국제질서의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의 충돌 속에서 남북이 다시 패권의 충돌지점에서 대결할 것인가 아니면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평화체제의 새로운 플랫폼이 될 것인가 하는 시대전환의 한복판이다.
코로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있는 자긍심으로 시대전환을 모색하자.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7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한반도의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체제로의 전환이라는 역사적 책임 앞에 무겁게 서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대결과 적대의 시간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20년 전 화해협력으로의 시대전환을 만들었던 용기를 다시 찾자. 2년 전 결코 돌아가지 않겠다는 실천의 약속을 기억하자. 합의의 성실한 이행만이 해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