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리 러 베이, <지속적으로 관계된 행위들>, 1967, 펠트, 유리, 가변적 크기, 휘트니미술관, 뉴욕.
이주은 ㅣ 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장마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수재가 발생했다. 티브이를 틀면 흙탕물에 휩쓸려 내려가는 물난리 장면이 뉴스의 자료화면에 나오고, 곧이어 너나없이 노란색 민방위복을 입은 공무원들의 다급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공무원의 노란 민방위복을 보면 국민은 즉각적으로 두가지 상반된 정보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 하나는 ‘지금은 비상시국이구나’ 하는 위기감이고, 또 하나는 ‘다들 성실하게 대처하고 있으니 잘 해결되겠지’라는 안도감이다.
그런데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질병관리본부 관계자들이 이미 겨울부터 노란 점퍼를 입어왔고, 거기에 올여름 수재대책본부 관계자들까지 합세하니, 온통 노란 물결이다. 국무위원을 포함하여 너나없이 일괄로 그 옷을 입고 나타나니, 노란 옷이 무색하게도 전달력을 잃어버린 듯하다. 심지어 행사 참가자에게 지급하는 단체복인가 착각할 때도 있다.
그러던 중 얼마 전에 어느 젊은 국회의원의 분홍 원피스가 논란이 됐다. 노란 점퍼가 형식을 중시하는 측면이라면, 분홍 원피스는 형식을 깨려는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사회에 그 두가지 태도가 공존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양상이라고 생각한다.
미술에서도 형식이 중요하니 내용을 다 비워내야 한다는 생각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미술작품이 이야기 전달에 치중하면 문학작품과 다를 바 없을 테니, 미술 고유의 전문성을 지키려면 연상을 일으킬 만한 요소들은 하나씩 없애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내용의 제거에 제거가 거듭되더니 마침내 딱 하나 본질적인 단위형태 이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미니멀리즘 미술을 말하는 것이다.
미술이 형식에만 치우치면 삶의 다양한 모습을 담기 어려워지고, 결국 삶에서 유리되고 만다. 이에 대한 반항의 일환으로 미니멀리즘의 결벽증적인 단순함이 완전히 뒤엎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미국의 로버트 모리스(1931년생)나
배리 러 베이(1941년생) 같은 미술가들이 ‘반형식’(anti-form)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아예 고정된 형태 자체가 없는 파격적인 작품을 선보인 것이다. 펠트 천과 유리 조각이 마룻바닥에 마구 나뒹굴어 마치 작업장의 쓰레기 같아 보이는 설치작품이 한 예다. 보통 이런 작품은 미술사적인 의미는 있지만 팔리지도 않고, 전시가 끝나면 바로 처분되곤 한다.
미술가들뿐 아니라 역사 속에서 우상 타파를 원하는 많은 이들이 형식 파괴의 방식으로 사회에 도전해왔다. 일본 전국시대의 영웅 오다 노부나가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상복도 입지 않고 나타나 한줌의 향을 영전에 던져버리는 무례를 범했다. 불미스러운 행동이지만 외피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읽어야 한다. 그는 아버지를 욕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아버지 세대로 대변되는 낡은 과거와 인연을 끊고 새로운 시대를 열고 싶었던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맛을 망치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어떤 때는 형식이 지나치게 부각된다 싶고, 또 어떤 때는 형식도 없이 담긴 내용물들이 이상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가령 오자 하나 없이 잘 정리된 별 내용 없는 논문이 있는가 하면 뒤죽박죽에 비문이 남발이지만 아이디어가 참신한 논문도 있다. 정장 입고 나타나 근사해 보이지만 그저 하객 대행으로 왔을 뿐인 사람도 있고, 맛있기로 소문난 음식이지만 지저분해 보이는 사발에 담겨 나와 전혀 손이 가지 않는 경우도 있다. 만일 형식과 내용 중 하나만 취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당신은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