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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연극 <폭발>과 5·18과 고려인들 / 김병학

등록 2021-03-29 19:31수정 2021-03-30 02:40

김병학 ㅣ 광주고려인마을 고려인역사유물전시관장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41년 전 옛소련 고려인들은 광주시민에게 뜨거운 동지애를 보여주고 있었다. 1980년 5월 전두환 군부가 광주에서 참혹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을 때 고려인들은 지금 우리가 미얀마 민주시민에게 그러하듯 광주시민에게 강렬한 연대의식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이는 한 고려인 극작가를 깊이 고뇌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뒤 그 작가는 특별한 희곡 한 편을 써서 이듬해 봄 ‘고려극장’ 연극 무대에 올린다.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티시에 소재한 ‘고려극장’은 이 연극을 시연한 뒤 2개월에 걸쳐 중앙아시아 여러 고려인 집성촌을 순회하며 공연했다. 고려인들은 연극 <폭발>을 보면서 1986년 5~6월 다시 한번 광주앓이를 했다.

극작가 한진이 쓴 희곡 <폭발>은 지금까지 재소 고려인이 생산한 모든 장르의 문학작품을 통틀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주요 사건으로 다룬 유일한 작품이다. 한진은 고려극장 2세대 극작가로 희곡 <의붓어머니> <고용병의 운명> 같은 굵직한 문제작들을 무대에 올리며 고려인 모국어 문화예술을 선도했다. 한반도의 자주와 평화를 염원한 희곡 <폭발>에 이어 남북통일 문제를 다룬 역작 <나무를 흔들지 마라>를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남겼다.

그로부터 35년의 세월이 흐른 2021년 3월 극단 ‘진달래 피네’(감독 최영화)는 제35회 광주연극제에 한진의 희곡 <폭발>을 다시 무대에 올렸다. 우리나라와는 전혀 다른 체제와 이데올로기 속에서 살았던 소련 고려인 지식인의 시각으로 광주의 상황을 극화한 작품을 지금의 한국 무대에 올리느라 연출자는 적지 않은 고민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때와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젊은 세대에게 이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최영화 감독은 그때의 감동을 고스란히 현재로 가져와 관객을 전염시키는 데 성공했다. 무대장치와 무대음악은 당시의 자료나 음원이 남아 있지 않아 연출자가 새로 구성했지만 극중 인물의 대사는 당시 ‘고려극장’ 무대에서 전개되었음 직한 장면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바로 여기서, 내용은 보존하되 전체적 얼개와 배경을 미묘하게 변형시키는 연출자의 마법이 힘을 발휘했던 것 같다. 즉 연출자는 반전과 자주라는 당시의 핵심 메시지를 현대의 확장된 그릇에 솜씨 있게 조리해 내놓음으로써 2021년 한국의 관객들이 골 깊은 이데올로기와 시공의 간극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온전히 현재의 시각으로 그 사건에 빠져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연극 <폭발>은 1985년 남한 내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으로 시작된다. 5·18 당시 대학생 아들을 잃어버린 심학수와 광주로 유학 가서 전두환 군부의 만행에 항거하다 붙잡혀 고문으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그의 아들 철호,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딸을 잃어버린 박용주와 미군 기지촌에 양공주로 팔려간 그의 딸 봉네 등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군부독재에 단호히 반대하고 한반도의 자주와 평화를 염원했던 작가의 뜻이 이 작품에 온전히 담겼다.

광주 고려인마을은 연극 <폭발>을 상설공연할 예정이다. 이 연극은 고려인마을 대표 공연콘텐츠인 <나는 고려인이다>(윤경미 작), <나의 고향 연해주, 타쉬켄트, 광주>(윤경미 작)와 함께 광주 고려인마을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정기적으로 공연되면서 긴 세월을 유랑해온 고려인들의 삶을 가슴 시리게 보여줄 것이다. 고려인역사유물전시관이 소장한 희곡 <폭발> 원고는 2020년 국가지정기록물 제13호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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