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한ㅣ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올해는 헬렌 포스터 스노(필명 님 웨일스)가 쓴 김산(장지락)의 전기인 <아리랑의 노래>(Song of Ariran)가 출판된 지 80년이 되는 해로서 다시 자세히 읽었다. 처음 1980년대 후반 버클리 대학원생 때 대충 읽었는데 이번에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와 관련해 당시 한반도 상황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현 상황을 생각하며 자세히 읽었다. 님 웨일스는 남편 에드거 스노와 함께 중국에 대한 저서를 여러 편 남겼는데, 그중 한국의 무장 독립운동에 관한 이 책이 독자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니 역설적이다.
미국을 비롯하여 서구의 한국 전공자들은 처음에는 중국이나 일본에 관심을 가졌다가 우연히 한국을 접하고 바꾼 경우가 대부분이다. 님 웨일스도 처음에는 중국 공산혁명에 관심을 갖고 중국 공산당의 본부인 옌안에 갔다가 김산을 만나고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물론 김산의 이야기는 한국, 중국, 일본, 만주, 그리고 중국 공산혁명을 모두 담고 있다. 한국 독립운동사로 시작해서 중국 공산혁명에 가담한 김산의 이야기는 한국인의 정서를 잘 담은 ‘아리랑 노래’이다.
최근 필자는 수년간 도산 안창호가 세운 파차파 캠프와 1926년 미국 이민국에 의해 추방되었던 사실들을 발굴했는데 <아리랑의 노래>를 다시 읽으면서 김산이 안창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주목했다. 일종의 안창호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상해에 있던 김산은 안창호가 1913년 미국에서 설립한 흥사단의 단원이 되었다. 김산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은 의열단 주요 간부였던 김충창이고 두번째가 안창호라고 밝히고 있다.
김산은 1924년 안창호가 공산주의자로 체포되었다고 회고했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다만 1926년 안창호는 콩 웡과 찰스 홍 리라는 신원 미상의 인물이 미국 이민국에 투서를 해서 공산주의자로 모함받으면서 오스트레일리아로 추방되었다. 안창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나 공산주의가 추구하는 혁명을 반대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안창호는 북한과 남한에서 동시에 인정하는 몇 안 되는 독립운동가인 듯하다.
안창호는 특히 김산에게 현실 정치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안창호는 1907~1911년 한국에서 신민회 활동을 하다가 1911년 가족이 있는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로 돌아가서 대한인국민회 활동을 주도한다. 그런데 필자는 1911년 11월 리버사이드에서 개최된 제3차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에서 중앙총회를 설립하고 실질적인 대한민국 무형정부를 설립했다는 사실을 밝혔는데 이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를 도입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안창호는 또한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하다는 평등 의식을 강조했다고 한다. 실제로 1918년 대한인국민회는 여성에게 남성들과 동등한 정회원 가입을 허락했고 그 이후 특히 1919년 3·1운동 직후부터 미주 한인 여성들은 남성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독립운동을 적극 주도한다. 1918년은 미국이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한 1920년보다 2년 앞선 때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또 하나 흥미롭게, 안창호가 흑인 포크송을 특히 좋아했고 김산 자신에게 여러 흑인 포크송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안창호는 점진주의자, 개량주의자가 아닌 혁명가였으며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평등과 통합을 주장하면서 언행일치를 한 민족의 지도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역사학계의 안목이 편협하고 안창호를 상대적으로 저평가하고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