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고 잘생긴 남자 주인공은 부유한 귀족 집안의 후계자였다. 여자 주인공도 젊고 아름답지만 집이 가난하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 신분 차이는 컸다. 남자의 어머니는 둘 사이를 갈라놓기로 한다. 타락한 성직자와 결탁해 여자 주인공을 납치, 수녀원에 감금하는데.' 재밌겠다! 새로 방영할 케이(K)드라마의 예고편일까? 아니다. 18세기 말에 활약한 영국 소설가 앤 래드클리프의 작품 첫머리다.
앤 래드클리프는 고딕 로맨스 소설의 대가다. 주인공은 초자연적 공포에 시달린다. 자신을 해치려는 음모에 둘러싸인 까닭이기도 하지만, 불길하고 으스스한 배경 묘사 역시 공포에 한몫한다. 스티븐 킹 같은 오늘날 공포소설 작가들도 영향을 받았다.
앤 래드클리프는 영국 사람이지만 이탈리아를 배경 삼아 소설을 썼다. 대표작 제목도 <이탈리아인>이다. “고딕”이라는 말의 어원을 생각하면 흥미롭다. 옛날 이탈리아 사람들이 독일 쪽 사람은 취향이 별로라며 “야만인 고트족스럽다”고 얕잡아 부르던 말이 “고딕”이라서다. 그러니 “이탈리아식 고딕이라는 말은 모순 어법에 가깝다 … 그런데 이탈리아라는 배경이 없었다면 초기 고딕소설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점을 연구한 논문들도 있다.(논문을 구해준 임승연 교수께 감사)
앤 래드클리프는 1764년 7월9일에 태어났다. 1797년에 출판한 <이탈리아인>이 크게 성공하자 작가 일을 접고 남편과 조용히 살았다. 가끔 글을 썼지만 출판은 하지 않았다. 다음 작품을 기다리던 독자들은 궁금했다. 앤 래드클리프가 납치되어 감금당했다는 소문도, 정신병에 걸렸다는 주장도 등장했다. 작가를 고딕소설의 주인공처럼 상상해버린 그 시절 고딕소설 독자의 ‘팬심' 역시 우리 눈길을 끈다.
김태권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