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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찬수 칼럼] 루스벨트의 뉴딜, 문재인의 뉴딜

등록 2021-08-25 16:06수정 2021-08-26 02:37

더 중요한 건, ‘뉴딜’을 추진하면서 대통령이 직접 국민에게 설명하고 설득하고 지지를 확산시키려는 노력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디지털 분야에서 청년 일자리를 창출하고, 플랫폼 노동자에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자영업자를 사회안전망에 편입하는 건 뉴딜의 핵심일뿐더러 수많은 국민에게 가장 절실한 삶의 문제다. 그런데 지금 ‘한국판 뉴딜’에서 경제와 사회개혁, 이 둘을 연결하는 소통과 설득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난해 9월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열린 ‘한국판 뉴딜’ 1차 전략회의 모습. 청와대 누리집
지난해 9월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열린 ‘한국판 뉴딜’ 1차 전략회의 모습. 청와대 누리집

박찬수 선임논설위원
박찬수 선임논설위원
한달 전쯤인 7월14일 청와대에선 ‘제4차 한국판 뉴딜 전략회의’가 열렸다. 1년 전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한국판 뉴딜’을 선언한 뒤 네번째로 열린 회의다. 첫 회의에서 문 대통령은 “한국판 뉴딜은 대한민국 새로운 100년의 설계이며 대한민국 대전환 선언”이라고 밝혔다. 향후 5년간 디지털·그린 뉴딜과 사회안전망에 160조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도 덧붙였다. 집권 후반기의 최대 국정 어젠다임에 분명하지만, 지금 그렇게 느끼는 국민은 별로 없는 듯싶다.

한국판 뉴딜이 의미 없다는 건 아니다. 디지털과 그린은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간주되기에 내년 3월 대선에서 누가 이기든 계속 추진할 수밖엔 없을 것이다. 특히 환경 보전과 탄소 제로를 추구하는 그린 분야는 우리가 집중 역량을 투입해야 할 부문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정부는 코로나 이후 경제 재건과 성장의 지렛대로 한국판 뉴딜을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요한 건, 1930년대 대공황 시절 미국에서 추진했던 ‘뉴딜’이란 이름을 거의 한세기가 지난 지금 한국에서 다시 되살린 이유를 정부가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가이다. 문 대통령은 “왜 한국판 뉴딜이라고 부르느냐, 원래 뉴딜은 세계 대공황 시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위기 극복을 위해 채택했던 정책이다. 가장 핵심적인 것 중 한 축은 노동자들의 권익 신장과 복지제도 도입이고, 다른 한 축은 대규모 공공 토목사업을 통해서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맞는 말이다. 전례 없는 팬데믹의 한복판에서 국정 핵심 어젠다에 ‘뉴딜’이란 이름을 붙인 건, 단지 경제 재건과 성장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 믿는다.

후버댐 건설로 상징되는 대규모 경제 부흥 사업이 뉴딜의 본질은 아니다.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전세계 수많은 정치인들이 ‘뉴딜’을 차용하는 건, 그것이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바꾸겠다는 담대한 사회개혁의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노동자와 여성, 흑인, 이민자 등 ‘잊힌 사람들’(forgotten people)에게 기본권을 보장해 스스로의 권익을 신장시킬 수 있게 하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1950년대 이후 수십년 동안 지속된 ‘풍요롭고 개방적인 미국’의 토대를 닦은 게 뉴딜이었다. 사회개혁 프로그램으로 보지 않고 투자와 성장 정책으로만 접근하면, 국민과의 ‘새로운 약속’(New Deal) 의미는 반감되고 성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 혁신 3개년 정책’처럼, 수많은 성장 정책 중의 하나로 국민의 기억에서 잊힐 것이다.

물론 정부는 ‘뉴딜’의 일환으로 사회안전망 강화에 많은 노력을 쏟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고용보험 확대는 대표적이다. 지난해 12월부터 예술인 6만여명이 새로 고용보험에 가입했다. 올해 7월부터는 12개 직종의 특별고용(특고)·플랫폼 노동자들에게 고용보험이 적용됐다. 의미 있는 변화이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1930년대 뉴딜 입법의 핵심은 노동자에게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보장한 것이었다. 지금도 노동 형태의 변화로 인해 수많은 특고·플랫폼 노동자와 간접고용 노동자들이 노동법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전통적 노동자의 개념을 확장해서 법의 울타리 밖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안전망을 제공하고, 자영업자들까지도 사회안전망 틀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이를 위해선 양대 노총을 비롯한 노동계와 협력을 모색하는 게 절실하다. 사회적 대화기구의 실패 탓에, 정부는 정규직에 기반한 노동조합을 우회해서 직접 비정규직과 미조직 노동자를 구제하겠다는 생각인 것 같지만 그 한계는 뚜렷하다. 당연한 얘기지만 비정규직의 조직화와 노동3권 보장에 훨씬 열성적인 세력은 자본이 아니라 기존 노동조합들이다. 한국판 뉴딜의 진정한 성공은 사회적 대화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 중요한 건, ‘뉴딜’을 추진하면서 대통령이 직접 국민에게 설명하고 설득하고 지지를 확산시키려는 노력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루스벨트의 뉴딜은 수많은 한계를 지녔지만, 끊임없이 국민과 소통하고 설득한 점만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루스벨트는 왜 뉴딜이 필요한지를 국민 생활과 연결해서 설명하고 지지를 넓혔다. 전무후무한 4선은 그렇게 가능했다. 디지털 분야에서 청년 일자리를 창출하고, 플랫폼 노동자에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자영업자를 사회안전망에 편입하는 건 뉴딜의 핵심일뿐더러 수많은 국민에게 가장 절실한 삶의 문제다. 지금 한국판 뉴딜에서 경제와 사회개혁, 이 둘을 연결하는 소통과 설득은 찾아보기 어렵다. 안타까운 일이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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