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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선출되지 않은 ‘곳간지기 권력’ 민주적 통제 어떻게

등록 2022-10-24 18:44수정 2022-10-25 02:34

[이창곤의 정담] 10 _기획재정부1
까다로운 예산심의는 누군가 응당 해야 할 일이며, 결코 허투루 할 수 없다. 기획재정부 설명대로 “각 부처 요구를 다 들어주다간 나라 살림이 거덜 날 것”이기에 누군가는 전체적인 틀에서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예산작업을 진행해야 할 필요성도 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심해 “이 나라가 기재부의 나라냐”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 또한 현실이다.

2022년 3월25일 당시 기획재정부 예산실장(왼쪽)이 세종시 어진동 기재부 브리핑실에서 2023년 예산안 편성지침 및 기금운용계획안 작성지침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2년 3월25일 당시 기획재정부 예산실장(왼쪽)이 세종시 어진동 기재부 브리핑실에서 2023년 예산안 편성지침 및 기금운용계획안 작성지침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모든 정책은 재정으로 통한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이다. 정책과 재정의 관계를 이토록 명징하게 응축한 말이 또 있을까. 어떤 정부 정책도 재정, 즉 돈 없이는 통할 수 없다. 제아무리 ‘신박’한 정책 아이디어도 재정 뒷받침 없이는 한낱 장밋빛 상상이나 공염불에 불과하다.

노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서도 국가재정에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재정운용시스템 개혁에 앞장서 국가재정법을 제정했고, 재정운용에 전략 개념을 도입했다. 대통령 주재 국가재정전략회의도 만들었다. ‘국무위원 재원 배분회의’로 불린 이 회의에서 그는 넥타이를 푼 채 부처 장관들과 장시간 격론을 벌였다. 이런 그도 퇴임 뒤 재정과 관련한 후회를 토로했다. 재임 중 복지에 좀 더 과감하게 재정을 투입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저서 <진보의 미래>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를 복지재정 크기의 순으로 나열하면 “보수의 나라, 진보의 나라 스펙트럼이 나온다”고 아쉬워했다.

국가재정은 엄밀히 말하면 중앙과 지방정부, 공공기관 등의 수입과 지출을 총괄하는 개념이지만, 우리나라에선 보통 중앙정부 재정으로 이해된다. 일반회계, 특별회계, 기금으로 꾸려지는 ‘정부총지출’이다.

흔히 말하는 예산은 일반회계와 특별회계를 합한 것인데, 예산 편성은 기획재정부의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다. 기재부는 예산은 물론 세금을 얼마나 어떻게 걷을지 조세업무도 가지고 있고, 경제정책과 금융 등 국가경제 전반을 총괄한다. 국가 중장기 발전전략도 기획, 수립한다. 대개 부처는 농림, 통상, 문화, 교육, 복지 등 고유 관할영역이 있는데, 기재부는 예산을 가지고 각 부처들을 관할한다. 기재부와 그 관료들을 두고 ‘부처 위의 부처’, ‘관료 위의 관료’라고 하는 이유다.

재정이라는 정책의 생살여탈권을 쥔 기재부는 대한민국 정책생태계의 주요 정책결정자 가운데 대통령과 그 비서실 다음으로 막강하다. 개별 정책 사업에 끼치는 실질적인 힘은 어쩌면 더 크다. 세부적인 내용은 대통령은 물론 비서실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재부는 예산의 기획과 편성을 모두 틀어쥐고 있다. 기소권과 수사권을 모두 쥐고 있던 검찰이 형사사법 분야에서 무소불위 힘을 발휘했던 것과 비슷하다.

기재부 예산실 200여명 인력은 정부 부처들의 예산 실무를 총괄한다. 예산실장과 예산총괄심의관 아래 사회·경제·복지안전·행정국방예산심의관이 있고, 이들 심의관 아래 세부 분야별로 과가 꾸려져 있다. 이들은 각 부처가 집행하는 8천여개를 넘나드는 정책 사업 예산을 심사, 조정한다.

연초 기재부가 예산편성지침을 각 부처에 보내면, 부처는 이 지침에 따라 그해 5월께 예산요구서를 만들어 기재부 담당과에 제출한다. 이렇게 시작된 기재부 담당과와 부처 사이 예산 조율은 겉으로는 문서로 오가는 조용한 협의지만, 사실상 기재부가 각 부처의 요구안에서 사업별로 깎고 자르고 조정하는 과정이다. 예산 시즌이 되면 부처 장차관은 물론, 전국 지방자치단체장들도 예산당국을 찾아 협조를 읍소하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어떤 정책을 입안해 집행하는 해당 부처 관료보다 기재부가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도 지하철 시위를 벌이며 보건복지부가 아닌 기재부 장관을 지목해 예산 반영을 요구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 한 부처 장관을 지낸 인사는 “역대 정권마다 책임장관제를 말하지만 실제 못하는 이유가 청와대의 과도한 간섭에다 장관에게 예산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해당 부처가 관할하는 예산의 10% 정도라도 장관이 자신의 정책방향에 맞춰 쓸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기재부가 그것을 받아들이겠냐”고 말했다.

예산 편성은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 수많은 국가정책의 지속과 확대, 혹은 폐기를 결정짓는 중대한 정책결정 과정이다. 기재부와 각 부처 사이 관료정치 과정이기도 하다. 까다로운 예산심의는 누군가 응당 해야 할 일이며, 결코 허투루 할 수 없다. 기재부 설명대로 “각 부처 요구를 다 들어주다간 나라 살림이 거덜 날 것”이기에 누군가는 전체적인 틀에서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예산작업을 진행해야 할 필요성도 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심해 “이 나라가 기재부의 나라냐”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 또한 현실이다. 특히 문재인 정부 시절 기재부는 재정건전성 유지를 명분으로 코로나19 팬데믹에 따른 재난지원금 지급 범위 액수, 손실보상금 제도 법제화를 두고 소극적인 태도를 고수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예산 편성 과정 자체의 문제제기도 끊이지 않는다. 예컨대, 예산 편성 실무자들이 해당 사업 전문가가 아니면서도 사실상 삭감의 전권을 쥐고 있다거나, 삭감되고 남은 재원이 때로는 각종 연줄에 따른 로비성 사업에 할당된다는 지적이 있다. 재정민주주의의 시선에서 보면, 예산의 삭감과 조정 등 기재부 의사결정 과정이 베일에 싸여 있다는 점이 근본적 문제다. 각 부처 예산 편성과 예산요구서 명세는 물론 협의·조정 과정 등 모든 과정이 깜깜이다. 예산 편성을 둘러싼 부처와 기재부 사이 ‘밀당’ 과정에서 어떤 정책의 예산이 어떤 이유로 깎이거나 사라졌는지 외부에서는 누구도 모른다.

그나마 국회가 예산안을 심의한다지만 촘촘한 검증과는 거리가 멀고, 헌법(제57조)에서는 국회도 정부 동의 없이 정부가 제출한 지출예산 각항의 금액을 늘리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재정의 급팽창을 막기 위한 ‘재정규율 장치’라지만, 달리 보면 예산안을 확정하는 국회조차 기재부가 애초 마련한 틀의 범위를 크게 넘어서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주요 권력기관들도 이럴진대 일반 국민이 예산 결정 과정을 알 재간은 도무지 없다. 알지 못하니 갑론을박할 여지도 거의 없다. 세금을 내 대한민국 금고를 채우면서도 정작 자신이 쌓은 돈의 쓰임새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 수 없고, 모든 걸 ‘금고지기’가 알아서 한다. 권한은 막강한데 감시와 견제가 부족하면 예산의 사유화, 관관로비 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신재민 전 기재부 사무관은 2020년 펴낸 저서 <왜 정권이 바뀌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가>에서 나랏돈이 ‘고위직들의 치적 쌓기’로 쓰인 사례를 폭로했다. 주인공은 예산편성 실무를 총괄하는 기재부 예산실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 예산을 직접 챙겼고, 차관을 거쳐 뒤에 해당 지역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했다. 총선 때 자신의 홍보물에서는 이해관계에 따른 예산 편성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노골적으로 표현하며 자랑했다고 한다. 그는 결국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개인적으로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10여년 전 영국 연수 시절, 대학 연구실에서 논문 집필에 매진할 때 일이다. 당시 같은 연구실에는 연수 온 기재부 공무원들도 있었는데, 어느 날 대화 도중에 한 기재부 공무원이 총선에 출마하려는 선배를 위해 그의 고향에 예산이 가도록 손을 쓴 적이 있다는 실언성 자백을 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적 권력의 결정은 시민에게 공개돼야 하며, 감시와 견제를 받아야 한다. 기재부의 예산 편성 과정도 예외일 수 없다. 투명한 공개와 재정권력의 민주적 통제는 재정민주주의의 기본적 요체다.

이창곤 |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복지를 중심으로 노동, 주거, 환경 등 사회정책 이슈에 특별한 관심을 쏟는다. <한겨레>에서 팀장과 부장, 논설위원, 부국장 등을 거쳤고,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장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공저), <복지국가를 만든 사람들-영국 편>, <불평등 한국, 복지국가를 꿈꾸다>(공저), <진보와 보수 미래를 논하다>(편저), <어떤 복지국가에서 살고 싶은가?>(편저) 등이 있다.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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