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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선의 풀무질] 거리 점령한 볼썽사나운 ‘정쟁’…현수막부터 걷어치우자

등록 2023-06-15 19:11수정 2023-06-15 21:27

인천 미추홀구 주안역 앞에 걸린 정당현수막. 인천시 제공
인천 미추홀구 주안역 앞에 걸린 정당현수막. 인천시 제공

[전범선의 풀무질] 전범선 | 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서울은 모든 감각의 자극이 과잉된 도시다. 가게에서는 음악 소리가 너무 크고, 거리의 네온사인은 눈부시게 밝다. 음식은 엄청 맵고 짜고 달다. 무엇보다 사람이 많아서 부대낄 수밖에 없다. 청각, 시각, 후각, 미각, 촉각이 전부 과부하된 상태다. (…) 정치 현수막은 가장 공적인 공간에서 나의 시각을 공격한다. 텔레비전은 끌 수 있고 댓글은 넘길 수 있지만 현수막은 보지 않을 수 없다.

동네마다 현수막이 나부낀다.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의힘을 욕하고 국민의힘은 민주당을 욕한다. 군소정당도 댓글 달듯이 싸움을 부추긴다. “친일”, “종북”, “매국노”, “깡패”를 부르고 “타도”, “척결”, “탄핵”, “감옥”을 외친다. 여의도의 볼썽사나운 정쟁이 거리를 점령했다. 덕분에 매일 걷는 산책길이 흉측해졌다.

이는 지난해 12월 옥외광고물법이 개정됐기 때문이다. 민주당 김민철 의원이 대표발의한 개정안은 정당 현수막에 관한 모든 제한을 없앴다. 기존에는 시·도지사에게 문구 허가를 받아야 했으나 이제 “통상적인 정당활동”에 해당하면 아무 말이나 쓸 수 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어디까지가 통상적인지 구분하기 어려워 규제하지 못한다. 그래서 동네방네 현수막 난장판이 됐다.

지금도 어지러운데 8월부터는 더 심각해질 예정이다. 현수막 설치를 규제했던 공직선거법 제90조 1항 1호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지난해 7월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이 조항은 올해 7월31일부로 효력을 잃는다. 그 이후로는 정당뿐 아니라 누구나 정치 현수막을 걸 수 있다. 벌써 정신이 혼미하다. 보다 못한 인천시는 정당 현수막 규제를 위한 조례를 만들어 시행에 나섰다. 국회에서도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이 여럿 발의됐다. 빨리 통과되지 않으면 이판사판이 될 것이다.

현수막은 공해다. 말 그대로 쓰레기다. 녹색연합에 따르면 플라스틱 합성섬유가 주성분인 현수막을 만들 때 장당 2.37㎏의 탄소가 배출된다. 참나무 한그루가 1년에 흡수하는 탄소가 10㎏이다. 2021년까지 연평균 126만건의 현수막이 신고됐으니, 해마다 참나무 30만그루를 심어야 흡수 가능한 양이다. 올해부터는 신고도 안 하고 설치하기 때문에 훨씬 많을 것이다. 철거된 선거 현수막은 지방자치단체가 소각 처리하는데 이때도 탄소가 발생하며 톤당 약 30만원 비용이 든다. 정치인들이 온라인 댓글보다 짧은 말로 서로 헐뜯는 일에 세금이 쓰인다. 디지털 대전환을 표방하는 대한민국에서 이런 낭비가 가당키나 한가?

정신적인 공해는 더 크다. 정치 현수막이 아니더라도 애초에 현수막이 보기 싫다. 서울은 모든 감각의 자극이 과잉된 도시다. 가게에서는 음악 소리가 너무 크고, 거리의 네온사인은 눈부시게 밝다. 음식은 엄청 맵고 짜고 달다. 무엇보다 사람이 많아서 부대낄 수밖에 없다. 청각, 시각, 후각, 미각, 촉각이 전부 과부하된 상태다. 과잉 자극은 공해다. 애써 무시하거나 감내하며 살다 보면 감각이 마비되고 정신이 피폐해진다. 정치 현수막은 가장 공적인 공간에서 나의 시각을 공격한다. 텔레비전은 끌 수 있고 댓글은 넘길 수 있지만 현수막은 보지 않을 수 없다. 일방적인 폭력이다.

내용이라도 착하면 좋겠다. 정치의 목적이 무엇이었나. 끝없는 싸움인가? 적을 죽이고 내가 이기는 것인가? 거대 양당 체제에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목적을 쉽게 망각한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국민의 자유, 생명, 행복 추구를 보장하는 것이며 정치는 그 수단이다. 그러나 작금의 정치는 정당의 집권을 위한 대국민 퍼포먼스로 전락했다. 중도보다 양극이 선거 결과를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정당은 극단으로 내달린다. 혐오와 선동의 토끼굴에 빠진다. 다수 국민은 소수의 정치 쇼를 관람하면서 불가피한 스트레스를 쌓는다. 무감각과 무관심이 또다시 양극화를 부채질하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 시대. 기후생태위기의 시대. 초인공지능이 도래하는 디지털 시대. 세상을 이분법적인 선악 구도로 나누고, 싸워서 이기려는 정치는 지속 불가능하다.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가치도, 타협할 수 없는 존재도 포용해 역설적인 상생을 이뤄야 한다. 다 같이 살려고 하지 않으면 다 죽게 생겼다. 핵전쟁과 기후생태위기와 초인공지능, 셋 중 하나만 잘못돼도 공멸이다. 동양과 서양, 중국과 미국, 진보와 보수, 자유와 평등, 남한과 북한,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 인간과 기계 등 모든 이분법을 넘어서는 정치가 필요하다.

21세기 정치의 목적은 조화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하모니’를 만들 수 있을까? 한반도, 나아가 지구촌이 한 살림, 한 식구라는 자각으로 생명공동체를 꾸릴 수 있을까? 과대망상 같지만 그것만이 살길이다. 정쟁의 현수막부터 걷어치우자. 모심과 살림의 메시지를 발신하는 정당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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