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논설위원
아침햇발
1980년대 초 대학에 다니러 처음 서울에 올 때 고향 사람들한테서 가장 많이 들은 충고는 “전라도 사람 가까이 사귀지 마라. 손해본다”는 말이었다. 다행히 경상도 시골 청년이 그런 편견에서 실증적으로 벗어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3학년 여름방학 때 광주의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전남도청 앞에서 파란불이 켜졌을 때 횡단보도를 막 건너려는 순간이었다. 작은 트럭 한대가 끽 소리를 내면서 행인들 앞에 간신히 섰다. ‘야, 운전 똑바로 안해?’라는 고함과 삿대질이 오가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워매, 깜짝 놀래부렸네요~잉!” 30대 남자의 말한마디가 전부였다. 다른 곳에서 보지 못했던 넉넉함이었다.
하지만 예향의 격조와 따뜻한 인심을 지닌 호남은 언제부턴가 정치적으로 늘 고독했다. 90%가 넘는 특정 정당 지지는 다른 정당과 지역으로부터 손가락질의 대상이 됐다. 이른바 여당 동네가 돼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지역감정의 피해자이면서도 지역감정의 벽에 여전히 갇힌 동네라는 엉뚱한 딱지까지 덮어쓴 딱한 처지가 됐다. 영남에 기반을 둔 한나라당과는 상극이 됐다.
외로운 호남에 싫지 않은 변화가 일고 있다. 전라도를 ‘딴나라’ ‘딴동네’라며 외면했던 한나라당이 호남 껴안기에 나선 것이다. 박근혜 전 대표가 시작한 한나라당의 호남 구애는, 위로는 대선주자부터 아래로는 당 사무처 직원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이다. 박 전 대표는 2년 간 호남 땅을 무려 열일곱번이나 찾았으며, 강재섭 대표는 취임 한 달 만에 세 번이나 방문했다. 일단 일회용은 아닌 듯하다. 시골마을에서 잠자고 농부들과 땀을 흘리는가 하면 도지사 등을 만나 예산지원을 약속하는 등 성심을 다하고 있다. 걸핏하면 영남을 찾았던 이회창 총재 시절과는 딴판이다.
물론 한나라당이 호남에 공을 쏟는 일차적 이유는 내년 대선을 겨냥해서다. 현재 5%에도 못미치는 득표율을 최소한 갑절인 10%대(약 30만표)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다. 호남에서의 두자릿수 득표는 수도권 호남 출향인의 비슷한 ‘전향’을 예상할 때 지난번과 같은 구도로 내년 대선이 치러지더라도 한나라당이 이길 수 있는 수치다. 과거 두 차례 대선의 표차이는 39만~57만표였다.
정치적 계산이라고 깎아내릴 일이 아니다. 오히려 한나라당의 호남 껴안기 시도는 김대중 정부 시절 민주당의 ‘동진정책’과 마찬가지로 정치 발전을 위한 좋은 시도로서, 칭찬받을 만하다. 특히 내용이 미흡하기는 했지만 강 대표가 어제 광주에서 “한나라당 전신 정당 시절부터 호남분들을 섭섭하게 해 드렸던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한다”며 처음으로 당 차원의 사과를 한 것은 진일보한 태도다.
하지만 한나라당에는 아직도 ‘핵심적인 2%’가 모자란다. 호남의 한과 아픔에 대한 이해 부족이 그것이다. “전라도 사람은 안돼”(경기도 광명시장)라는 편견과 차별이 아직도 이 사회에 뿌리 깊은 데 대한 책임을 과감하게 인정해야 한다. 발언 당사자를 당에서 쫓아냈다고 다가 아니다. 또 호남의 한나라당 외면이 지역적 특성이 아니라 한나라당과 그 전신 정당·정권들이 호남을 ‘빨갱이 김대중’을 지지하는 이상한 동네로 왜곡하고 고립시킨 지역차별의 결과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지역정당을 탈피하려는 제도도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결자해지다.
호남 차별을 하기 전인 71년 대통령 선거 때 박정희 후보는 호남에서 32%를 얻었다. 반면에 김대중 후보는 영남에서 27%를 얻었다. 한나라당이 호남 구애에 희망을 가져도 되는 까닭이다. 차원을 높여 꾸준히 하길 바란다.
김종철 논설위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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