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노획문서’ 단상 / 정용욱

등록 2006-08-13 18:00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세상읽기
가슴에 손을 얹고/ 살그먼-히 눈을 감으면/ 어느새 그대는 내 앞에 나타나/ 깊흔 잠속에서도/ 나는 그대를 잊지 않었고/ 그대도 나를 버리지 않었다/ 꿈, 꿈, 꿈일지라도/ 그대는 내 마음속에/ 꽃봉오리처럼 아름다히 피어올라/ 젊은 내 심장을 격분시키노니/ 오, 내 사랑이여/ 영원한 나의 애인이여!/ 그대의 반가운 소식을 들을 때/ 삼천리여, 나의 조국이여!/ 나는 하늘만큼 깃버하노라/ 그 긴 겨울밤이 물러가고/ 새벽의 고요한 짬에도/ 너는 내 눈앞에 어리어지드라

한눈에 보아도 격정만 가지고 썼음을 알 수 있는 이 시는 현재 미국 메릴랜드주 컬리지파크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관의 ‘북한군 노획문서철’에 남아 있다. 제목은 〈가슴에 손을 얹고〉이고, 지은이는 최원오라는 젊은이로, 이 시를 지을 무렵에는 중앙아시아 타슈켄트의 한 농대에 유학 중이었다. 그는 당시 북한 재정상을 지낸 최창익의 손자로서 절절한 조국애를 표현한 이 시는 할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들어 있다. 조부와 손자가 주고받은 사사로운 편지들이 이국의 한 문서고에서 잠자고 있을 때는 예사롭지 않은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노획문서철은 한국전쟁 중 미군이 한반도에서 수집한 문서들을 하나의 문서철로 분류해 놓은 것이다. 미군은 한국전쟁 중 적의 문서들을 노획하기 위해 꽤나 용의주도하게 움직였다. 노획문서의 대부분은 미군의 평양 진주 때 나왔는데, 미군 방첩대는 평양 입성 이전에 문서를 노획하고자 인디언헤드 특별부대를 구성하였다. 이 부대는 전투부대보다 먼저 평양에 들어가서 체계적으로 정보수집 대상물을 장악하였고, 작전은 큰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되었다. 노획문서철은 해방 이후 북한에서 나온 각종 공·사문서, 책, 신문, 잡지 등 온갖 기록물과 출판물, 시각자료로 구성된다.

자료를 많이 접하다 보면 자료의 내용보다 형식과 외양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 문서철 가운데 모스크바에서 출간한 레닌이나 스탈린 저술의 한국어 번역본은 매끈한 종이에다 인쇄상태도 양호하고 제본도 잘 되어 있다. 반면 당시 고등교육기관들에서 사용한 과학기술 관련 교과서들은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듯한 형편없는 지질에다 인쇄상태나 제본도 조악하다. 마치 당시 남한에서 발간된 미군정 홍보물과 한국인 출판물의 외양의 대비와 흡사하고, 식민지 상태에서 갓 해방된 나라와 그 나라에 주둔한 강대국 처지의 차이를 반영하는 듯하다. 당시 한반도 주민들에게 더 절실한 것은 좋은 지질에 인쇄된 외국 제도나 이념의 선전이 아니라 비록 과학기술 교과서처럼 ‘똥종이’에 인쇄되었지만 우리 스스로 선택하고, 새나라 건설에 필요한 그런 지식들이 아니었을까.

8·15가 코앞이다. 해방된 지 60년이 지났지만 연구자들은 그 당시 생산된 자료를 보고자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가야 하고, 그 자료들은 여전히 ‘노획문서’ 등의 전쟁용어로 분류되어 있으며, 한반도는 분단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획문서’ 자료 목록을 만드느라 몇 주째 대학원생들과 함께 구슬땀을 흘리며 이 여름을 보내고 있다. 작업의 의의에 공감하고 기꺼이 방학을 할애한 이 젊은이들이 고맙고 자랑스럽다. 지금 이들이 보는 자료들은 증오로 얼룩진 분열의 기록들이지만 이들이 앞으로 쓰고 만들어가는 역사는 화해와 통일의 역사가 되기를 바란다.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