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범 대중문화팀장
아침햇발
홍상수 감독의 영화 〈해변의 여인〉을 본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지금도 고현정이 연기한 문숙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중래(김승우)와 처음 만나 관계를 한 문숙은 며칠 뒤 다시 중래가 묵는 펜션으로 찾아온다. 그때 중래는 다른 여자와 있었다. 문숙은 중래의 펜션 문을 열심히 두드리다가 문밖에서 잠이 든다. 중래는 문숙 몰래 다른 여자를 내보낸 뒤 문숙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온다. 다시 며칠 뒤 문숙은 그날 밤 일을 중래에게 묻다가, 중래가 다른 여자와 있었음을 알게 된다. 버럭 화를 내며 하는 말. “그럼 (문밖에서 자고 있는) 나를 넘어갔단 말이야? 넘어간 거 맞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정작 궁금하고 화가 나는 건 중래가 다른 여자와 관계를 했느냐 여부일 텐데, 문숙은 자기 몸을 넘어갔느냐를 따지며 고래고래 소리지른다. 자존심 때문에 그러는 것이겠지만, 실제로 홍 감독 말대로 ‘자기 다리만 넘어가도 난리를 떠는’ 사람이 있다. 중래를 처음 만난 날 밤 문숙은 해변에서 별을 보며 “저 별들도 사람들이 보아주니까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밝고 긍정적이고 소녀 같기도 한 문숙이 자기 발만 넘어가도 난리를 떠는 유형의 인간이라는 게 잘 안 어울릴 것 같은데, 막상 문숙이 소리지를 때 보면 무척 어울린다. 실제로 사람들에겐 저마다 엉뚱해 보이는 구석이 있지 않은가. 그 사소한 아이러니를 잡아챌 때 캐릭터는 더할 나위 없이 살가워진다.
요 며칠 사이에 〈해변의 여인〉을 보러 갔다가 간판을 내려 보지 못했다는 이들을 몇 명 만났다. 지난 8월31일 200곳 가까운 스크린에서 개봉한 〈해변의 여인〉은 26일 현재 충주 씨제이(CJ) 시네마 한 곳에서만 상영하고 있다. 〈반칙왕〉 〈스캔들〉 〈너는 내 운명〉 등의 흥행작을 냈던 영화사 봄의 오정완 대표가 제작을 맡아, 홍상수 영화론 처음으로 텔레비전 광고까지 하면서 프린트와 마케팅 비용을 15억원 썼다. 영화도 홍 감독 영화 중에서 가장 덜 불편하고 많이 웃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현정이라는 톱스타의 첫 영화 출연작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손님 든 건 20만명에 불과하다. 일부에선 고현정의 스타 파워가 떨어진 것이라는 분석도 내놓았지만, 최근 시작한 고현정 출연의 〈여우야 뭐하니〉의 시청률은 높다.
‘예술영화’처럼 보이는 작품, ‘예술영화 감독’이라는 낙인이 찍힌 감독의 영화를 관객들이 기피하기 시작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또 영화가 취향대로 보는 것이어서 관객들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해변의 여인〉의 흥행 결과를 두고, 홍상수의 팬으로서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다만 홍상수 영화에 대해선, 아이러니를 잘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 풍토가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이 남는다.
홍상수 영화는 짧게 요약하기가,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얘기야?”라고 누가 물을 때 대답하기가 어렵다. 이건 홍 감독이 영화를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감독들이 사물의 각을 세워서 묘사할 때, 홍 감독은 그 각을 애써 죽이면서 고정관념으로 말미암은 왜곡된 연상작용이 일어나는 걸 막으려고 한다. 그래서 아이러니가 많아진다. 먹고살기 바쁜 현실 사회는 단순하고 명쾌한 메시지를 좋아하지만, 그 사회를 반추하고 반성하는 문화 행위는 아이러니를 많이 낚아챌수록 깊고 풍부해진다. 가난하던 시절, 독재의 억압과 맞서 싸워야 했던 시절엔 메시지를 중시할 수밖에 없겠지만, 지금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시대가 크게 바뀌지 않은 건지, 인터넷의 단답형 논쟁문화 탓인지 변화의 폭이 크지 않은 듯하다. 영화 한 편 가지고 너무 많이 나간 걸까.
임범 대중문화팀장 is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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