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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혜신 칼럼] 자기존재 증명욕구

등록 2007-03-07 17:48수정 2007-04-06 11:56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칼럼
논쟁에 참여한 당사자들과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의 자세는 전혀 다르다. 당사자들은 어떻게든 자기 논리의 독창성이나 정확성을 입증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구경꾼은 느긋할 뿐아니라 때로 날카로운 비평자가 될 수도 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배우다가 사과를 닮은 연인의 볼그스롬한 볼을 떠올리는 젊은이처럼, 본질에서 비껴나 무한의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여유까지 보장된다.

그런 점에서 최장집 교수로부터 시작된 진보 논쟁을 지켜보는 일은 흥미롭다. 오랜만에 접하는 성찰적 논쟁의 내용도 반갑지만 대통령의 개입으로 논쟁의 판이 커져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는 보너스다. 당대의 이론가들이 말의 칼을 날리고 한편으론 방어를 위해 정교한 논리의 축성술이 동원된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논쟁자의 자기존재 증명욕구가 과다하거나 부적절하여 핵심이 흐려지는 경우도 있다. 피고의 권익보호라는 최종 목표를 깜박한 채 자신의 화려한 변론이나 산술적 승률에 몰입하는 변호사가 있다면, 그와 비슷하다.

애초에 노무현 대통령이 진보 논쟁을 더 크게 촉발시킨 이유는 명료하다. 대통령이 어려워서 이해를 못할 정도의 논쟁이라면 일반 국민들은 그것을 자신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현학적이고 뜬구름잡는 얘기라고 생각할 것이므로 현재의 논쟁이 올바르게 가고 있는가를 따져보자는 것이다. 그 말에 동의 못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이번 논쟁에서 노 대통령 또한 자기존재 증명욕구가 부적절하게 커보인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노 대통령은 개헌 문제와 관련하여 “처음 듣는 얘기라도 대통령이 꺼냈으면 한번 들어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국민이 선출해서 대통령이 된 사람이므로 사회에서도 그 정도의 무게는 인정해 줘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노 대통령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현실세계에서 노 대통령이 설정한 의제는 단번에 사회적 현안으로 떠오른다. 구태여 그렇게까지 자기존재감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 나는 노 대통령처럼 자기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충분한 수단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경우 오히려 그런 욕구를 절제할 수 있어야 더 확실하게 자기 존재감이 드러난다고 믿는다. 진보란 다르게 표현하면 자기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이나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을 더 먼저 배려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진보논쟁의 끝점에는 논쟁자가 아니라 자기존재 증명의 수단조차 보유하지 못한 이들이 자리해야 마땅하다.

열흘 전 특별한 이력을 가진 50대 스님 한분이 세상을 떠났다. 모진 고문 끝에 간첩으로 몰려 17년간 옥살이를 한 뒤 승려가 된 보광 스님이다. 그가 출가해서도 속세와의 한가닥 끈을 놓지 않고 국가보안법 재심 청구에 매달린 것은 6살, 4살에 생이별한 남매에게 아버지가 간첩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은 일념 때문이었단다. 처절할 만큼 최소한의 자기존재 증명욕구였지만, 그는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오늘 3·8 세계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케이티엑스 열차승무지부가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받는다. 일년이 넘는 장기투쟁을 벌이는 동안 380명이었던 승무원의 수는 80명으로 줄었다. 성차별과 불법에 맞서는 최소한의 자기존재 증명욕구지만 이 젊은 여성들의 꿈은 아직도 칼바람 부는 거리 위에 있다.

논쟁의 뒤편에는 이런 이들이 수없이 많다. 인간에게, 최소한의 자기존재 증명욕구는 생존에 필수적인 산소와 같다. 자기존재를 증명할 힘이 없는 사람들의 존재감을 배려하지 않는 것은 산소 없이 재주껏 살라는 말과 마찬가지다. 만화적 상상의 세계가 아닌 한 누구도 그렇게 살 수는 없다. 유익한 진보논쟁에서 논쟁 당사자들이 꼭 유념했으면 하는, 한 구경꾼의 간곡한 당부다.

정혜신/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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