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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익명을 쓰는 이유 / 홍은택

등록 2008-03-30 19:52수정 2008-03-30 19:57

홍은택/엔에이치엔(NHN) 이사
홍은택/엔에이치엔(NHN) 이사
세상읽기
뉴스에 댓글을 쓰는 사람들 중에는 수십 가지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전문 ‘낚시꾼’들이다. 그들에게 댓글 공간은 낚시터다. 지어낸 떡밥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낚는다. 워낙 먹음직스러워서 사람들은 낚시바늘을 물어 버린다. 그 사람이 쓴 다른 글을 본 이용자들은 작문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만 재미로 받아들인다.

이들이 직업을 수시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익명의 글쓰기 덕분이다. 표현의 자유를 위한 제한적 실명의 공간을 창작교실로 개조한다. 한 아이디(gang-te-gong)로 글을 쓰는 이용자는 개고기에 관한 기사가 나오면 보신탕집 주인, 동물에 관한 기사에는 동물전문 사진작가, 소말리아에 관한 기사에서는 소말리아 거주 한국인, 물에 관한 기사에서는 수질환경 학자로 변신한다. 백상아리 보호 연구소장으로, 부엉이 연구자로도, 목욕탕주인으로 직업을 바꿀 뿐 아니라 케냐·짐바브웨·이집트·이라크·일본·시베리아 등 공간도 자유자재로 이동한다. 이 이용자에게 낚이는 이유는 구체성에 있다. 그 현장에 있지 않고서는 그리고 그 직업에 종사하지 않고서는 알기 어려운 전문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우리가 보통 ‘사실’로 받아들이는 기사의 서사 구조도 크게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하는 기사의 작법을 풍자하는 듯한 느낌도 받는다. 매일 쏟아져 나오는 많은 기사들을 보면, 검찰의 한 관계자, 감식단의 한 관계자, 한 채권딜러, 친박계의 한 의원 등 익명의 취재원들이 자주 등장한다. 익명의 관계자가 실제 인물인지 독자로서는 알 수 없다. 언론사와 기자를 믿기 때문에 실제 인물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취재원의 익명화를 남발할 경우 살짝 그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취재원의 이름을 익명으로 처리하는 이유는 취재원의 신원이 공개됐을 때 취재원이 직장을 잃는다든지의 불이익을 받을 수 있고, 익명으로 하는 증언이 공익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지금 언론에서 인용하는 익명의 취재원들은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했다고 믿기에는 너무 자주 등장한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2003년 이라크 전쟁의 명분이 공격을 받자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제조 가능성을 강조하는 비밀문서를 주디스 밀러 <뉴욕타임스> 기자에게만 미리 보여주라고 지시했다. 밀러 기자는 익명의 미국 의회 관계자로부터 그 비밀문서를 입수한 것처럼 보도해서 정부의 입장을 강화한 사실이 ‘리크 게이트’의 법정에서 밝혀진 바 있다. 한국의 경우에도 김만복 전 국정원장이 방북 비밀보고서를 언론에 직접 유출한 경우가 그에 해당한다. ‘강태공’이 익명으로 작문하는 것은 무해하지만 정보를 쥐고 있는 사람들은 본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익명을 이용할 위험이 있다.

꼭 권력자들만은 아니다. 때로는 ‘강태공’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댓글계에서 이제는 은퇴한 것으로 보이는 ‘99ruma’라는 이용자는 폭주족 양성화에 대한 기사에 일본의 폭주족 문화를 전하는 재일동포로 인용돼 기자라는 대형 월척을 낚은 낚시터의 전설이 됐다. 언론에서 여론을 전할 때 인터넷 게시판에 게재된 의견을 확인 없이 인용하면서 생겨난 해프닝이다.

인터넷 게시판의 아이디만으로는 그 사람이 낚시꾼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다. 앞서 거론한 취재원 익명화의 두 가지 조건에 선행하는 대전제는 취재원의 신원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터넷의 아이디만으로는 신원이 파악됐다고 보기 어렵다. 언론은 확인된 사실을 쓰는 곳이라는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 본다. 한가지 더 덧붙이면, 익명의 취재원을 인용한 다른 언론사의 기사를 재인용해서 보도하는 경향도 나타나는데, 같은 이유에서 다시 생각해 줬으면 한다.

홍은택/엔에이치엔(NHN)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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