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현두/원불교 교무
운하 반대 순례단
순례의 끝이 보입니다. 발걸음 무거울 때, 입마다 하나씩 물려 부는 버들피리의 가벼움, 흐르는 강물의 마음이었습니다.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 순례자인 김현길 교무가 버들피리를 가지고 흐르는 강물 위로 소풍 나왔을 때는 강변 보리싹이 한 뼘으로 자랄 무렵이었습니다. 이젠 강 어딜 가나 보리는 이삭을 내밀고 이삭 사이로 생명의 따뜻한 바람이 붑니다. 결코 가볍지만 않았던 100일 순례의 종착지가 보임에도 여전히 들려오는 ‘대운하’의 망령은 좀처럼 사그라질 줄 모르고 틈만 나면 악령으로 되살아납니다.
산업화에 떠밀려 뭇생명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가치들을 경제적으로 환산했던 지난 시기의 암울함은 이제 ‘대운하’ 악령으로 말미암아 극에 이릅니다. 생명의 강은 산과 산이 마주하는 그 사이로 인간의 삶속 깊이 흘러왔습니다. 여유롭게 돌아 흐르는 강물의 가치를 마치 시궁창에서 환골탈태한 시멘트 덩어리 청계천으로 비유되는 것이 맞는지요? 천박한 개발의 발상은 어디까지이며, 도대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인간의 실상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명을 품고 흐르는 강물의 가치가 경제적 가치에 마치 흠집이라도 되는 듯, 버려진 강이라고 표현하는 그 삭막함 사이로 버들피리가 날립니다.
물길 따라 흐르는 발걸음마다 하늘을 담고 땅을 담는 기도는 순간순간 가슴 벅참으로 가득했습니다. 지나온 걸음을 다시금 돌아보는 시간들마다 스쳐 지나는 풍광들. 강과 인간의 완충지대인 습지에서 뜀박질 치던 고라니의 뒷모습, 흔적으로만 남은 너구리 똥밭, 갈대 무성한 곳에서 갑자기 솟구치는 꿩 부부, 언제 강으로 찾아들었는지 모를 백로 큰걸음을 제비꽃, 흰제비꽃, 민들레 등 수많은 풀꽃들이 웃음으로 반겼습니다. 걷다 잠시 쉬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삐’ 울리는 버들피리, 어쩌다 하나 받아들면 아이마냥 즐거워 입에선 연신 침이 고입니다. 자연과 인간의 완충지대인 습지를 황폐한 강이라 치부하는 그들의 입도 언제인가 버들피리를 물었을 것입니다.
오래도록 생명의 강은 흘렀습니다. 버들피리 울려 퍼지던 생명의 강은 이제 그 흐름을 멈추어야 할 죽음의 시간에 점점 다가서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지금껏 저질러 온 죽음의 강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조아림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늘도 놀라고 땅도 놀랄 ‘대운하’란 악령으로 죽음을 앞당기려 합니다. ‘대운하’란 악령은 탐욕에 찌든 인간들이 자연을 부려 쓰는 마지막 사치 치고는 너무나 가혹한 재앙입니다. 강을 꾸민다는 것은 그 자체로 생명에 대한 경시며 인간의 표독스런 오만과 다를 게 없습니다.
생명의 강은 스스로 길을 만들며 그렇게 흘러왔습니다. 앞으로도 생명의 강 스스로 흘러갈 때 비로소 인간이 지닌 생명의 가치와 더불어 뭇생명들과의 공동체를 이루는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많은 세월, 개발이란 이름으로 소중하게 간직되어야 할 정신적 가치를 훼손시켜 왔습니다. 물질의 풍성함이 결코 정신의 풍요를 담보하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의 강에서 버들피리를 부는 것은 수많은 풀꽃들의 반김을 뒤로 하고 뭇생명들과 이별의 아쉬움을 나누는 사람들의 고단한 삶에 더없는 여유로움입니다. 강에 이르면 어김없이 바람이 붑니다. 걷는 발걸음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불어오는 바람을 한 움큼 받아들고 가만히 귀 기울이면 그대로 강물 위를 흐르는 버들피리가 됩니다.
홍현두/원불교 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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