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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북녘에 띄우는 글월 / 백기완

등록 2008-06-11 19:27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기고
붓만 떨리는 게 아닙니다. 온몸이 떨리는군요.

1946년 겨울, 어머니한테 보내는 글월을 끝으로 예순세 해 만에 쓰고자 하니 눈앞이 트릿해져 붓을 놀릴 수가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쐬주 한 모금을 꿀꺽, 그러고도 한참동안 숨을 고르고 나서 그때야 퍼뜩 떠올랐습니다. 내가 미육(어리석음)을 저질렀나 보구나. 딴 게 아닙니다.

얼마 앞서 북녘에 쌀이 떨어졌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갑자기 눈자위에 시뻘건 숯덩이를 쑤셔 박는 것처럼 뜨거운 것이 그냥 좔좔좔. 못 견디겠더라구요.

그래서 무턱대고 북녘에 쌀을 좀 보내야겠다고 하질 않았겠어요. 오매, 백가마니지만 내 손으로 개성까지만 가져다 주고 싶다고 했더랬습니다. 여기저기서 갸륵함이 더해 400가마니쯤 된 것이 어느덧 한 달. 하지만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아무 데서도 아무런 더쿵(반응)이 없는 겁니다. 알아볼 데도 없고.

이때 문득 뉘우침이 오더라구요. 북녘에 쌀이 떨어졌다면 그것은 갈라짐 때문이거늘 쌀 몇 톨이 무슨 미념(소용)이 있으랴. 더구나 밖으로부터 갈라진 아픔을 죄어오는 욱박을 앙짱 깨뜨려야 하거늘 한갓된 일맘(인정) 따위는 참말로 백주한(쓸데없는) 짓이라는 깨우침이 들자 한숨이 일었습니다.

나라는 사람은 마냥 그 꼴이었거든요. 1953년 가을이었을 겁니다. 한강 모래밭에서 헤엄을 쳐 관악산으로 가려는데 시커먼 장작개비가 가로막았습니다. 새까맣게 탄 어느 젊은이의 팔뚝이었습니다. 마치 죽어서도 하늘을 할퀴고 있는 듯한 숯덩이. 너무나 안쓰러워 모래로 덮어 주면 이내 바람에 날리고 또 덮어도 또 날리고. 젊은 나는 그 자리에 엎드려 울부짖었드랬습니다.

‘그렇다, 저 원통한 넋을 목숨으로 틔우자.’ 그래서 젊은날을 ‘나무심기 운동’으로 불을 지를 때입니다.

“야 인석아, 원혼을 달래려고 하면 전쟁의 틀거리 그 뿌리를 뽑아야지, 그 따위 헤설픈 감상으로 돼?” 또 어떤 벗은 “야 인석아, 이참은 죽어가는 목숨부터 살려야 할 때야!” 달구름(세월)은 흘러 55년, 요즈음도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댓님(당신)은 왜 그리 감상적으로 살어?”


하지만 자꾸 눈물만 납니다. 그러니까 예순세 해 앞서군요. 축구선수를 만들어 준다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오던 날 황해도 은율 일도 고갯마루까지 마중 나오신 어머니 말씀을 잊을 수가 없어서 그런 겁니다.

“야 부심아, 아버지를 따라가 보았자 배는 더 주릴 거야. 하지만 모래를 짜 먹는 한이 있어도 굶주림 따위엔 허리를 꺾지 말어. 그래야 축구선수가 될 수 있는 거야.” 어머니 말씀대로 제아무리 배가 고파도 허리를 꺾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축구선수는 못 되었지요.

그러는 도막에 두 가지 버릇이 돋친(생긴) 겁니다. 하나는 뜻이 있어도 돈이 없으면 이룰 수가 없는 잘못된 벗나래(세상)를 냅다 차는 거, 그거이 진짜 축구라는 것과 또 하나는 쌀이 떨어졌다는 말만 들어도 힘은 없고 자꾸만 눈물이 나는 버릇입니다.

그래서 묻는 겁니다. 얼추(혹) 속대(자존심)에 걸기작이 안 된다면 개성까지만 마중 나올 사람은 없을까요.

“백마를 달리던 고구려 쌈터다/ 파묻힌 성터 위에 청노새는 간다간다 …” 어쩌고 하는 노래를 휘파람으로 제끼며 가고 싶은데 어쩌지요.

열나(만약)에 아무 맞대(대답)가 없을 것이면 어쩝니까. 먹어서는 안 되지만 눈물이 떠 가는 술이나 먹어야지요 뭐. 잘잘 ….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 백 소장은 지난달 17일 자신이 직접 쌀을 가지고 개성까지 가서 북쪽에 전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남북 당국은 아직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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