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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백승종의역설] 칭병(稱病)

등록 2008-10-31 19:52

백승종 경희대 객원교수
백승종 경희대 객원교수
백승종의역설
때로는 병을 핑계 대는 것이 당당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의병장 곽재우의 경우가 그랬다. 그는 왜적에 빌붙은 공휘겸의 목을 벴고, 전라도로 쳐들어가는 왜군을 길목에서 잘도 막아냈다. 그러나 의병장 김덕령이 모함에 걸려 비명횡사하자 산속에 들어가 세상을 등졌다. 1608년, 광해군이 곽재우를 발탁했다. 새 왕의 인심수습용 인사였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그는 병을 이유로 사직상소만 올려댔다. 왕이 의복과 말까지 보내오자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올라오긴 왔는데, 미리 작심한 듯 언관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임금을 속이지 말라!” 곽재우의 이 한마디에 온 조정이 뒤집혔다. 그러고는 벼슬 끈을 던진 채 가야산으로 유유히 떠나갔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툭하면 병을 핑계 삼았다. <실록>에서 ‘칭병’을 검색하면 무려 658개의 기사가 뜬다. 명종 때 김인후는 사화가 일어날 조짐이 있자 병을 구실로 끝내 벼슬을 사양했다. 칭병은 선비들이 지조를 앞세워 조정을 떠날 때 흔히 둘러대는 구실이었다. 그것은 선비의 소극적인 저항이요, 청명을 보전하는 공인된 수단이었다.

하지만 직무가 고되고 귀찮아서 칭병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허균도 병을 이유로 중국에 사신으로 가기를 거부한 적이 있다. 이런 허균을 가리켜 광해군은 “신하로서 의리가 없다”, “조정을 깔본다”고 질책한 뒤 바로 갈아치웠다. 순조 때 어영대장 신대현은 주문모 신부를 효수하라는 명령을 받자 병을 핑계로 미적거리다 파면되었다. 칭병은 직무태만 또는 직무유기의 방편이기도 했다.

조정에서는 신병을 빙자해 직무에 태만한 관리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한 달에 병결이 3일이면 견책, 5일 이상이면 무조건 해임했다. 신병을 구실로 국정감사를 거부한 것만으로는 부족해, 아예 병원에 진을 치고 부하들을 수족처럼 부려 가며 억지 쓰는 고위 공직자가 있다. 이런 사람은 죽은 옛 법을 되살려서라도 징계해야 옳다.

백승종 경희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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