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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한국사회] 25년 전 그 아이는 … / 박수정

등록 2008-12-29 21:55수정 2008-12-29 22:37

박수정 르포작가
박수정 르포작가
야!한국사회
‘울 엄마 이름은 걱정이래요/ 여름이면 물 걱정/ 겨울이면 연탄 걱정/ 일 년 내내 쌀 걱정// 낮이면 살 걱정/ 밤이면 애들 걱정/ 밤낮으로 걱정 걱정// 울 엄마 이름은 걱정이구요/ 울 아빠 이름은 주정이래요/ 내 이름은 눈물과 한숨이지요.’(하월곡동에 사는 12살 소녀가 지은 시)

낡은 책을 펼친다. 1983년에 나온 <한국의 가난한 여성에 관한 연구>라는 책이다. 머리말 앞장에 저 시가 박혀 있다. 지금은 저때보다 나아졌을까?

지난 24일 서울 강남성모병원 앞마당, 비정규직 노동자와 함께하는 미사 끝 무렵. 앞에 나온, (병원에선 계약종료라 하지만 사실은) 해고당한 노동자는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물기가 가득했다. 나는 눈물 한 방울 없이 앉았는데 그이는 미사 내내 울었나 보다. 올해 줄곧 여기저기서 벼랑으로 내몰린 노동자들이 있었다. 소식을 들으면 마음이 아리긴 했지만 사회가 휘두른 칼날에 바로 마음 베인 당사자들 같기야 했을까. 뒤돌아서면 아린 마음, 쉽게 아련해진다. 그이가 말했다. “원치 않는 숫자지만 100일이 되었다. … 씩씩하고 밝게 싸웠지만 속으로 왜 슬프지 않았겠는가, 밤마다 울지 않았겠느냐”고. “더 어려운 길을 가야 할 것 같아서 두렵고 겁나고 힘든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지나온 100일보다 더 험한 그 길을 넘어가겠다”고.

병원으로 들어가 봤다. 곳곳 업무 의자에 앉거나 복도를 오가는 노동자들은 다양한 제복을 입었다. 지금은 따뜻한 병원 안에서 일하지만 언젠가 계약종료로 쫓겨날 사람들이다. 복종하지 않으면 언제든 거리로 내몰리리라. 병원 성탄미사에 해고자들이 들어와 시위할까, 휴게실에 잔뜩 세워놓은 경비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벌써 많은 병원 업무가 계약·파견·용역·도급으로 바뀌었다. 제단 뒤쪽, 성화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했지만, ‘우리’에 해고자들이 없듯이, 병원 안 노동자들 모두 처음부터 저 ‘우리’ 밖에 놓인 건 아닐까. 미사 초반에 “가난한 사람, 고독한 사람, 무력한 사람”이라는 말이 들렸다. 함께해야 한다는 거겠지. 아, 신부님은 왜 가난하고 고독하고 무력한 자들을 눈앞에 두고도 모르실까. 등잔 밑이 어두운 탓일까, 그 자들을 너무 멀리서 찾지 마시지. 정작 그이들은 찻길 옆에서 “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눈물 참으면서 외치는데.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정규·비정규를 막론하고 “현장으로 돌아가자”고 외치게 될까. 어디고 사람 존중은 들어설 틈도 없이 쓰다가 버리는 일 흔한데, 그마저 성에 안 차 더 쉽게 해고하자는 기업과 정부이니 말이다. 동희오토 해고 노동자들이 유인물을 빼앗아 달아난 관리자한테 한 말이 있다. “한 시간이라도 라인 타봤어? 너도 라인 타다 짤려봐!”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은 그 마음을 모를 거다. 콜트노조 지회장은 지난해 조합원들과 정리해고 당해 천막농성을 하면서 시를 썼다. “… 구조조정의 봄/ 해고노동자들의 눈망울 속에/ 분노만 타오르고/ 어린 아들의 눈망울 속엔/ 두려움이 고여 있다. …” 분노와 두려움이 계속 무시당하면 더 큰 저항이 일 게다. “용인기업 동지들이 집단으로 해고돼 나갔다. 그때 내가 봤다”며 눈으로 본 걸 외면하지 않는 노동자가 어디선가 늘어나리라. 그런데 그 현대미포조선 노동자는 지금 100미터 굴뚝 위에 있다.

12살 ‘눈물과 한숨’이는 이제 어른일 텐데 ‘허드렛일’로 취급된 ‘비공식 노동’에 내몰렸던 엄마보다 더 폭폭한 삶을 사는 건 아닌지. 지금 아이들은 어른들과 자신에게 어떤 이름을 붙여줄까. 낡은 세상을 덮는다.

박수정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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