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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프리즘] 일 권하는 사회의 악덕 / 정세라

등록 2009-03-31 22:02수정 2009-03-31 23:28

정세라 산업팀 기자
정세라 산업팀 기자
한겨레프리즘
일은 미덕이다. 잠 안 자고 일한다는 대통령에게 그러하고, <한겨레>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취재원과 늦도록 술을 마셔도, 다음날 샘솟는 아이디어와 기사를 기대한다. 의무휴가제 시절엔 연말에 돈도 못 받고 날리는 연월차가 넘쳐 났다. 물론 나보다 더 넘쳐 나는 선후배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니 불평하긴 어렵다.

‘앉으면 기사 쓰고, 서면 취재, 누우면 기획하라’고 배웠다. 물론 배운 대로 늘 실천하진 않았다. 앉아선 졸고, 서서도 멍 때리고, 눕자마자 잠드는 나날도 많았다. 하지만 적어도 내 일중독이 남보다 부족하게 ‘비치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건 당연했다.

그렇다. 나는 일이 지배하는 사회에 넌덜머리를 내다가도, 스스로 눈치를 보고 자책을 했다. 경제위기라니 더 그랬다. 바지런한 이들이 일하고 싶어 줄을 섰는데, 자리만 차지한 건 아닌가, 죄의식까지 곱씹었다. 물론, 얼마 안 가 또다시 넌더리를 내는 일은 반복된다.

지난주 북유럽 사회경제 정책을 이르는 ‘노르딕 모델’을 취재하러 노르웨이를 다녀 왔다. 일과 복지의 선순환을 통해 경제위기를 가장 안정감 있게 견딘다는 북유럽 사회의 정책 해법을 보러 간 것이다.

주한 노르웨이 대사는 모국으로 떠나는 내게, 한국은 노동 시간은 긴데 그만큼 생산성이 나오지 않아서 안타깝다는 말을 건넸다. 또 합계 출산율이 1.19로 세계 최저 수준을 기록하는 우리네 사정을 걱정했다.

나는 농반진반으로 답했다. 우리는 싫으나 좋으나 ‘늦도록’ ‘휴일 불문’ 일해야 하기 때문에, 당신네처럼 매순간 열심히 일하면 힘들어서 안 된다고 했다. 노르웨이의 연간 노동시간은 1411시간인데, 우리는 2261시간이 아닌가.

전 세계가 경제위기로 떠들썩한데, 이들은 한국 기자 눈에 지나치게 담담해 보였다. 하루 7시간30분을 일하는 나라의 노조는 하루 6시간으로 노동을 줄이는 방안을 추진했고, 이는 위기에도 굽혀서는 안 되는 장기적 목표라고 설명했다. 한때 한국에 떠들썩했던 노르딕 모델 후퇴 논란에 대해서는, 정부·기업·노조·정치인이 한목소리로 “사실이 아니다”라고 못을 박았다.

노르딕 모델에선 일하는 시간이 줄어든다고 해서, 곧바로 경제적 낭비나 게으름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일하는 이들이 심신을 회복하거나 자기 계발에 쓸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고, 가족 친화적 삶을 누리게 하는 게 퍽이나 중요하다. 일과 삶의 균형이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어 낸다고 보는 것이다. 이들은 그렇게 해서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합계 출산율을 1.9로 유지시켰다. 이는 복지 시스템 유지에 필요한 세금을 거두고, 다음 세대에 일할 사람을 안정적으로 키워 내게 해 준다. 우리 여성 경제활동 참여율이 50%에서 멈칫대고, 출산율은 세계 최저로 추락하는 동안 이들이 만들어 낸 사회 모델이다.


이들을 상대로 한국식 일자리 나누기를 설명하기란 힘들었다. 일자리 나누기는 원래 노동시간을 줄여서, 일하는 사람 수를 늘리자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위기해법으로 등장한 우리식 모델은 노동시간 단축은 안중에 없고, 그저 임금 깎기만 부각시킨다. 그나마도 문제 많은 청년 인턴 양산용이다.

노르딕 모델은 일자리가 부족하니, 그저 일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일자리가 줄고 실업률이 올라가면, 탄탄한 복지 시스템으로 활성화된 육아휴직이나 재교육 확대 등으로 남는 노동력 흡수에 나선다. 위기를 구실로 다 함께 일중독으로 가는 건 오히려 악덕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런 사회도 있다.

정세라 산업팀 기자sera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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