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만약 허생(許生)이 살아 돌아온다면 / 윤진호

등록 2009-07-30 21:41

윤진호  인하대 경제학부 교수
윤진호 인하대 경제학부 교수

조선시대의 위대한 저술가 연암 박지원이 쓴 소설 <허생전>에는 당시 권력자였던 어영대장 이완이 허생의 집을 방문하여 명나라의 은혜를 갚고 청나라를 물리칠 계책을 묻는 장면이 나온다. 허생은 이완에게 묻는다. 만약 자신이 제갈공명 같은 인재를 천거하면 임금이 삼고초려를 할 수 있는지? 이완은 이에 대해 불가(不可)하다고 대답하고 제2의 계책을 묻는다. 허생은 다시 묻는다. 명나라 장졸의 자손들에게 종실의 딸을 시집보내고 권력자들의 집을 빼앗아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지? 이에 대한 대답도 역시 불가하다이다. 허생은 다시 양반 자제들의 머리를 깎고 되놈의 옷을 입혀서 청나라에 장사치로 보내어 동태를 파악하고 인맥을 만들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 세 가지 질문에 이완 대장은 모두 불가하다고 대답한다. 이에 허생은 크게 노하여 칼을 찾아 목을 베려 하니 이완 대장이 혼비백산하여 도망간다.

당시 권력자들의 무능과 무지를 통렬하게 비판한 허생전의 이 대목은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하기 위한 개혁정책이 기득권층의 반대에 부닥쳐 실패하게 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허생이 제시한 계책들은 모두 당시의 특권층인 양반층의 이해관계를 건드리는 민감한 방안이었기에 실패하였던 것이다.

만약 허생이 다시 살아 돌아와서 오늘의 한국 현실을 본다면 온갖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민생경제를 구하기 위해 과연 무슨 계책을 내놓을까 상상해 본다.

허생: 일부 기득권층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지 말고 널리 여론을 수렴하고 천하의 인재를 모아 정치를 할 수 있겠는가?

정부: 불가하오.

허생: 부자들만을 위한 감세정책과 건설회사 배만 불리는 토목사업을 중단하고 그 예산을 돌려서 민생경제를 구하고 복지지출을 늘리는 데 쓸 수 있겠는가?

정부: 불가하오.


허생: 저임금과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 비정규직 보호대책을 세우고, 재벌들의 무분별한 점포 확장으로 폐업 위기에 놓인 자영업자들을 위해 영세자영업자 보호정책을 실시할 수 있겠는가?

정부: 불가하오.

허생: 예끼, 그러고도 나라의 녹을 먹는 공직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부·여당은 미디어법 파동을 수습하고 국면 전환을 위해 서민생활 안정대책을 세운다고 한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부실하기 짝이 없다. 서민 주거 안정, 소액대출 확대, 일자리 창출 등은 나름대로 효과가 어느 정도 있겠지만 핵심적인 정책들은 아니다. 그렇다. 서민생활 안정을 위한 계책이 모자라고 수단이 없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런 계책과 수단이 대부분 기득권층의 이해관계와 충돌하는데 정부·여당이 이들의 이해관계 보호에 치중하고 있다는 데 있다. 바로 이 때문에 230년 전 허생의 계책을 당시의 권력층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다시 태어난 허생의 계책 역시 현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뻔하다.

부자 감세 철폐, 토목사업 집중투자 중단, 재벌의 무분별한 확장 규제, 비정규직과 영세자영업자 보호대책 수립 등 기득권층의 이해관계와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정책들은 쏙 빼버린 서민생활 안정대책, 그것은 “앙꼬 없는 찐빵”이라고나 할까. 230년 전의 허생은 자신의 계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홀연히 종적을 감추어버렸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윤진호 인하대 경제학부 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