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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백승종의역설] 감청

등록 2009-09-04 18:28

백승종 독일 보훔대 한국학과장 대리
백승종 독일 보훔대 한국학과장 대리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여기서 쥐와 새는 누구인가. 밀고자 또는 불특정 다수의 감시자이다. 그들이 비밀을 훔치는 방법은 많을 테지만, 엿듣고 엿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손쉬운 방법임은 물론이다.

조선시대에는 워낙 도덕과 인륜을 중시해, 남의 언행을 엿듣고 엿보는 것 자체를 죄악시했다. 공신 이숙번은 재상 하윤이 태종에게 아뢰는 내용을 엿듣다 들키는 바람에 한바탕 애를 먹었다. 세종 때 이명덕이란 고관 또한 남의 집 울타리에 기대어 사람들의 말을 엿들은 과거 행적이 드러났기 때문에 출세에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도 남의 말을 엿듣고 비밀을 염탐해, 상대를 해치거나 심지어 역모 혐의를 씌워 밀고하는 경우가 많았다. 쥐와 새는 언제나 있는 법이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하자 엿듣고 훔쳐보는 기술도 나날이 진보한다. 1972년, 미국에서는 닉슨 대통령을 재당선시키려고 그 부하들이 워싱턴 소재 워터게이트빌딩에 위치한 야당 사무실에 잠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닉슨은 대통령 재임 중 사임이라는 미국 사상 초유의 불명예를 안았다. 하지만 도청은 닉슨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전체주의 또는 권위주의 정권, 요컨대 비민주사회라면 어디나 널리 서식하는 독버섯이다. 조지 오웰이 명저 <1984>에 묘사한 엿듣기와 훔쳐보기는 21세기의 일상 풍경인 것이다.

내용은 도청과 다름없지만, 법원이 허락하면 이를 감청이라 부른다. 그러나 합법적이라 해서 그 폐해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일찍이 미셸 푸코는 감청이 그 대상자에게 “연극을 강요”한다며 통렬히 비판했다. 요즘 제기된 국정원의 패킷감청 같은 경우는 그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혐의자는 물론, 동일한 인터넷 회선을 사용하는 많은 사람들의 사생활도 실시간 감시되기 때문이다. 결국 감청의 만연은 우리 사회를 불신과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다. 이게 법과 질서인가?

백승종 독일 보훔대 한국학과장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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