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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선주 칼럼] 한옥에 이사 와 보니 …

등록 2009-12-14 21:34수정 2018-05-11 15:05

김선주 언론인
김선주 언론인
35년가량 살던 아파트 생활을 청산했다. 주변에선 강남의 강변아파트가 재개발이 되면 떼부자가 된다고 팔지 말라고 했다. 일단 결심이 서자 팔아치웠다. 세금도 어마어마하게 냈지만 주택담보대출 받은 것을 갚고 나니 후련했다.

우여곡절 끝에 한옥으로 이사 왔다. 북촌 주변의 삐까번쩍하고 진솔옷처럼 말끔한 한옥이 아니다. 지붕이 잡초로 뒤덮이고 비 새는 기와 이 귀퉁이 저 귀퉁이를 까만 비닐로 두겹세겹 동여매놓은, 귀신 나오게 생긴 한옥이다. 누군가가 살던 집인데 나라고 못 살겠나 대청소하고 도배 장판만 새로 하면 되겠지 생각했다. 짐이 다 빠져나간 집을 들어와보고야 뭔가 잘못되었지 싶었다. 칠을 하기 위해 뜯어낸 천장으로 군데군데 새파란 하늘이 보였고 지붕 위에선 고양이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기둥은 내려앉았고 서까래와 대들보는 썩어서 속이 빈 것투성이였다. 문은 아귀가 맞는 것 하나도 없이 빠짐없이 삐꺽거렸다.

이사 온 날 떡을 돌렸다. 앞집 할머니는 답례로 치약 세 개를 예쁘게 포장해 오셨고 건너편 골목의 할아버지는 대봉홍시 커다란 것 세 개를 담아 오셨다. 구멍가게 할머니는 김치 한 냄비를 수북하게 담아다 주셨다. 이곳 주민들은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40년 살았다, 50년 살았다고 말씀하신다. 노인들은 살림 사는 사람이 들어왔다고 좋아하셨다. 한옥을 말쑥하게 고쳐서 갤러리나 카페 혹은 신식 레스토랑이 들어오고 3~40대의 젊은이들이 주인이 되었는데 60대 여자가 살림 살기 위해 불편한 한옥에 들어온 것을 신기해했다.

내가 살던 아파트도 펼침막과 연판장이 나돌았다. 재개발의 몸살 때문이다. 이해관계가 얽힌 주민들 사이에 비난과 음모론 등으로 헐뜯느라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는데 이곳도 마찬가지다. 이곳 서촌에는 한옥이 283채 있다고 한다. 서울시가 한옥 보존을 한다고 하니까 집주인들은 지금까지 재개발에 희망을 걸고 불편함을 감수하고 살았는데 무슨 소리냐고 주장한다. 노인들은 동네를 떠나고 싶지 않다고 하고 자녀들은 값이 올랐을 때 팔자고 노부모들을 닦달한다고 한다. 아니면 일찌감치 전세를 주고 재개발이 되기만 기다린다.

북촌이 아름답다지만 나는 이곳 서촌이 훨씬 정겹고 아름답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낮은 담장 너머로 빨래 넌 것도 보이고 가을이면 골목길에 빨간 고추를 말리는 채반을 내놓기도 한다. 대문을 열고 삼삼오오 앉아서 김칫거리를 다듬기도 하고 어느 집 손녀인지 큰 빗자루를 들고 낙엽을 쓸고 있는 풍경도 보았다. 서울시가 한옥 고치는 데 지원을 해준다고 하지만 노인들은 엄두를 못 낸다. 한두 달 좋은 곳에 가서 사시게 하고 순차적으로 고쳐서 한옥을 보존했으면 좋겠다. 지금 이대로 가면 사람 사는 한옥은 전부 없어지고 갤러리나 카페 천국이 될 것 같다. 자동차가 들어오지 않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하염없이 돌아 나오면 어디서나 인왕산과 북한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런 아름다운 동네가 사라질까 두렵다.

태어나서 결혼 전까지 한옥에 살았던 남편은 한옥 이사를 반대했다. 아들은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살다가 내복부터 사 입고 군대에서 입던 깔깔이 작업복을 걸치고 산다. 손은 시리지만 아랫목에 누우면 등이 따뜻하고 작은 마당과 하늘이 보이고 밤이면 달도 별도 뜬다. 새벽에 일어나 마당에서 훌라후프도 몇 번 돌리고 아들이 꺼내놓은 아령도 들었다 놓았다 한다. 기분이 나면 칭칭 동여매고 나가 골목길 끝까지 쓰레질도 한다. 나는 지금 한옥에 이사 가서 춥지요, 불편하지요 묻는 사람들을 꾀고 있는 중이다. 너무 좋다, 아주 좋다, 전세는 아주 싸고 또 기한도 5년짜리가 많으니까 고치고 들어와서 살면 된다 하면서. 이곳 서촌이 사람들이 사는 한옥마을로 개발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김선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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