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 역사학자
실학자 성호 이익은 노비제도를 가리켜 천하에 없는 악법이라 규탄했다. 설사 즉각 폐지하기는 어렵더라도 인신매매라도 우선 금지하자고 했다. 물론 이런 주장이 그대로 통할 리는 없었다. 노비란 양반들에게 일종의 필수품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벼슬아치가 모두 나무하고 물 긷는 수고를 노비에게 대신하게 함으로써 염치를 기를 수 있게 되니, 그들에게 의지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성종실록>에 나오는 어느 대신의 말처럼 양반들에게 노비는 수족과도 같았다. 그 수도 많아 성종 때는 전체 인구의 3할쯤이 노비였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도망 노비가 크게 늘어나면서 노비제도는 조금씩 무너져갔다. 농업생산력이 발전하자 임노동이 대세를 이뤘고, 생산성이 낮은 노비 노동력은 구매력을 잃었다. 여기에 노비들의 사회적 각성도 있어 노비의 도망은 누구도 막지 못할 역사적 대세를 이뤘다.
도망 노비들을 붙잡아 오거나, 그 자손들에게서 오랫동안 밀린 세공을 받아내는 일이 바로 추노(推奴)였다. 이것이 성사되려면, 도망 노비들이 살고 있는 지방 관청의 도움이 절실했다. 16세기 말 오희문은 <쇄미록>이란 일기책에서 충청도 직산 현감의 도움으로 자신의 도망 노비를 추노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추노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조선후기에 저술된 한문소설을 읽어보면, 추노에 나섰다가 도망 노비들의 계략에 빠져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가 적지 않다. 추노에 관한 조정의 입장 역시 대체로 미온적이었다. 결국 도망 노비는 양인이 되어 국가의 조세자원이 되리란 기대 때문이었다. 국가로서는 주인 양반과 노비 사이의 명분 못지않게 세원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청년실업자가 증가하고 비정규직이 늘어가고 있는 이 나라에서 대다수 시민들은 탈출구가 없다. 신자유주의라는 추노꾼에게 내몰리는 도망 노비나 다름없는 신세다. 은연중 도망 노비를 보호한 조선시대 국가운영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백승종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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