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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청와대 사슴의 울음소리 / 박찬수

등록 2010-03-24 20:30

박찬수  편집국 부국장
박찬수 편집국 부국장




청와대엔 사슴이 산다. 2008년 5월에 서울대공원에서 들여온 꽃사슴이다. 암수 3마리가 새끼를 쳐서 지금은 8마리로 불어났다. 북한산 기슭을 돌아다니다 종종 청와대 대정원까지도 내려오기에, 운 좋은 관람객들은 청와대 뜰에서 사슴과 마주칠 수도 있다. 비서실 관계자는 “청와대 경내에서 사슴을 본 시민들은 깜짝 놀라면서 아주 좋아한다”고 말했다. 평화롭고 선한 사슴의 이미지가 권부의 딱딱한 이미지를 씻어내는 데 톡톡히 일조하는 것 같다.

사슴의 울음소리를 ‘녹명’(鹿鳴)이라고 한다. 청와대 인사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단어다. 권력 내부에 이 말을 퍼뜨린 이는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다. 그는 정권 초기 기자간담회에서 “나이 일흔을 넘으니 마음에 와닿는 생각이 많아진다”며 ‘녹명’을 들었다. 사슴은 먹이를 발견하면 다른 짐승들처럼 고개부터 먹이에 처박지 않는다. 먼저 청아한 울음을 토해내 근처의 다른 사슴들을 불러모아 같이 먹는다고 한다. 독점하지 않고 함께 나눈다는 게 ‘녹명’에 담긴 뜻이다. 울음으로써 멀리 떨어진 동료와 소통한다는 뜻도 담겨 있을 것이다. 청와대에 사슴이 방목된 시기는 공교롭게도 광우병 촛불시위로 이명박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에 처했을 때였다. 정권의 인사들은 ‘녹명’이란 단어를 가슴에 새기며 사슴의 울음소리가 청와대 밖 멀리멀리까지 퍼져나가길 기대했으리라.

정권 초기에 회자됐던 말을 지금 다시 꺼내는 건 다른 뜻이 아니다. 요즘 벌어지는 일을 보면, 사슴 울음소리가 청와대 담장을 넘어 퍼지는 건 고사하고 한번이라도 사슴이 제대로 운 적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이 직접 만든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공익 성격의 위성·케이블채널 <시민방송 RTV>에 정부 지원금을 싹 끊어버린 건 대표적인 사례다. 반면에 약간의 이익이라도 남을 것 같은 정부 발주 사업이나 지원금은 뉴라이트가 싹쓸이한다. 지원금을 끊은 기관은 방송통신위원회다. 마음엔 ‘녹명’을 새기면서, 손으론 시민사회 진영의 목줄을 죄는 격이다.

김우룡, 안상수, 유인촌, 김태영 등 요즘 꼬리를 물고 터지는 ‘악재’(정권 처지에서 본다면)의 본질도 다르지 않다. 당사자들의 헤픈 입을 탓할 게 아니다. 자기들끼리 자리 다툼을 벌이고,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에겐 ‘좌파’ 딱지를 붙여 밀어내느라 정신이 없는 탓이다. 울음을 토해 동료를 부르기는커녕 오히려 멀리 쫓아버리고, 피아를 구분 못하고 함께 먹이를 찾아 헤맸던 동지까지 물어뜯는 야수의 본성만이 권력 주변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정권 초기에 한나라당의 어느 의원은 “사냥이 끝났으니 사냥개는 필요없다”고 말했다가 친이명박 직계 의원들로부터 호되게 공격받은 적이 있다. 사냥은 이 정권 5년 내내 계속될 모양이다. 울음으로 소통하는 사슴은 보이지 않고, 이빨 사나운 사냥개들만 권력 곳곳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형국이다.

숱한 비난을 받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지만 “인사가 만사”라는 말 한마디만은 새겨들을 만하다. ‘전리품은 승리자의 것’(To the Victor Belongs the Spoils)이란 말에서 유래한 스포일스 시스템(엽관제)은 대통령제에서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제대로 된 사람을 써야 한다. 그게 어려우면 인사의 폭을 과감하게 넓혀야 한다. 지금처럼 능력은 도외시한 채 ‘과거 정권 사람들’을 모조리 쫓아내고 그 자리를 사냥에 능한 사람들로만 채워서는 악재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집권 3년차에 접어든 이명박 정권의 성패를 결정짓는 건 실적이 아니라 사람이다.

박찬수 편집국 부국장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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