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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프리즘] 다윗의 계란 / 정세라

등록 2010-04-29 19:47수정 2010-04-30 08:48

정세라  경제부문 기자
정세라 경제부문 기자




“봄이 참 더디게 옵니다. … 그저 내 한 몸 열심히 살면 되는 줄 알았던 세상이지만, 이제 누구도 보호해줄 수 없는 절망의 늪으로 우리 상인들이 점점 빨려들어가고 있습니다.”

중소상인 대표 인태연씨가 정운찬 총리에게 쓴 공개편지는 절절했다. 영세 자영업자들은 대개 밤낮도 휴일도 없이 살아간다. 할리우드 영화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에는 한국인 슈퍼 주인 부부의 억척스런 모습이 잠깐 스쳐 지나간다. 뉴욕 경찰로 나오는 니컬러스 케이지는 한국인 슈퍼에 들렀다가 주인 남자의 이상한(?) 말을 듣고 가게 안에 강도가 숨어 있다는 걸 직감한다. 슈퍼 주인은 “아내가 감기로 쉰다”고 얘기했는데, 그의 상식으로는 한국인은 감기 정도로 쉴 리 없는 사람들인 까닭이다. 아마도 우리 동네 슈퍼 주인들 모습도 이와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언젠가부터 이런 부지런과 억척스러움에 최소한의 생존도 보상해주지 않는 시스템으로 흘러가고 있다. 중소상인들은 아무리 내 한 몸 열심히 살아도 식구 서넛의 입에 풀칠하고 아이들 공부시키는 삶조차 지탱하기 버겁다. 대형마트와 기업형슈퍼(SSM) 등을 운영하는 신세계·롯데쇼핑 등 유통 대기업들은 올해 1분기에 줄줄이 사상 최대 실적 팡파르를 울렸다. 하지만 이 소식에 절망만 깊어지는 게 중소상인들의 솔직한 심정이다.

지금 유통 대기업이 탐내는 것은 슈퍼마켓 시장이다. 대형마트는 전국 450여개 점포로 연간 31조원의 매출을 올리지만 이미 성장 한계에 부닥쳤다. 이들에게 연간 22조원의 매출을 내는 슈퍼마켓 시장은 매력적인 신개척지다. 슈퍼마켓은 9만5000여개 점포 가운데 90% 이상이 가장 작은 대형마트의 20분의 1 크기에도 못 미칠 만큼 영세하다. 동네슈퍼한테 ‘새끼 대형마트’나 마찬가지인 기업형슈퍼와의 경쟁은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 중소상인들이 바라는 건 다윗의 손에 돌멩이라도 하나 쥐여달라는 것이다. ‘자유경쟁’을 이유로 다윗에게 골리앗과 육탄전을 벌이라 권고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호소한다.

사실 다윗은 돌멩이 하나 없이 맨손으로 골리앗한테 맞서다가 이미 그로기 상태다. 정부와 국회는 너무했나 싶었던지 뒤늦게 규제 입법을 고민했는데, 돌멩이 대신 계란 정도를 제안했다. 골리앗이 계란을 맞는다고 쓰러질 리야 없겠지만 다윗이 계란을 던지는 시늉이라도 하면 움찔할까 싶었나 보다.

이번 유통법 개정안은 상인들의 기대치를 워낙 밑돌았다. 때문에 기업형슈퍼와 골목 상권이 정면충돌하는 사업조정 지역 대부분은 오로지 상생법 강화안만 바라본다. 하지만 외교통상부는 이런 ‘다윗의 계란’마저 깨자고 나섰다. 이들은 통상분쟁 ‘가능성’만으로도 중소상인 보호 입법에 강력한 반대자로 나섰다. 기업형슈퍼 가맹점을 사업조정 대상에 포함시키려는 상생법 강화안의 폐기를 고집스레 주장했다. ‘통상협정 위반’ ‘과도한 규제’만 앵무새처럼 되뇌일 뿐이었다.


한나라당 법사위 의원들은 다윗의 계란을 깨는 데 춤을 춘 또다른 주역이었다. 이들은 상생법 강화를 전제로 야당과 상인 대표의 대폭 양보를 얻어낸 유통법 개정안만 단독 처리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비겁한 합의 뒤집기에 다름없는 일이다.

외교부는 국제협상의 기술자일 뿐이다. 아무리 우리 경제가 대외의존도가 높다고 해도, 대외협상 기술자가 우리 경제의 균형점을 잡고 밑그림을 설계해야 할 입법 과정을 휘두르는 풍경은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봄은 참 더디게도 오는 모양이다.

sera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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