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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홍구-서해성의 직설] 거룩한 패배는 기어코 승리한다

등록 2010-05-27 19:49수정 2010-05-28 10:21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지는 것도 중요하다” 1980년 5월27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이 끝난 뒤 두 손이 묶인 채 끌려가는 시민군들.  나경택 전 <연합뉴스> 기자 제공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지는 것도 중요하다” 1980년 5월27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이 끝난 뒤 두 손이 묶인 채 끌려가는 시민군들. 나경택 전 <연합뉴스> 기자 제공
‘방아타령’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지우려는 시대에 ‘5·27 광주’란 무엇인가




한홍구-서해성의 직설
한홍구-서해성의 직설
[한홍구-서해성의 직설]
제2화 2010년, 거대한 제삿날들

‘○○주년’이 많다.

유난히 올해는 그렇다. 5월23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주년이었다. 27일은 광주에서 시민군이 진압된 지 30주년 되는 날이었다. 4월엔 4·19혁명 50주년이 있었다. 다음달 25일은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이다. 7월24일엔 경술국치 100주년, 11월13일엔 전태일 분신 40주년을 맞는다. 20세기 한국 현대사의 주요사건을 기억할 날들이 줄줄이사탕이다. 서해성에 따르면 “민중적 반격의 거점으로서 절묘한 타이밍”이다.

두번째 ‘직설’의 핵심 화두는 1980년 5월27일 새벽까지 전남도청에 남았던 시민군들이다. 그날 그 최후의 저항이 없었다면, 한홍구와 서해성의 인생은 지금과 달랐으리라. 노무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당신도…. 2010년 5월 한국 사회는 광주의 자식들과 광주의 정신을 부정하려는 자들의 한판대결처럼 보인다. 올해 5·18 기념식장에서 벌어진 ‘임을 위한 행진곡’과 ‘방아타령’의 신경전(!)은 그 희극적인 단면이었다.

한홍구와 서해성은 ○○주년, 쉽게 말해 제삿날들을 음미했다. 그날들이 지니는 오늘의 의미를 짚었다. 아, 그 전에 먼저 첫 회 반성부터!

진행·정리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서해성(이하 서) 첫 대담 평가부터 하죠. 더 다리를 떨고 어깨에서 힘도 빼야 한다는 평이 많아요. 처음부터 펀치력이 떨어지지 않았냐는 얘기도 있고.

한홍구(이하 한) 서해성이 입을 덜 쥐어뜯어 그렇겠지.(웃음) 한겨레를 패려니까 풀 스윙이 좀 안 됐어.

아무튼 우리도 반성하고 시작하려니 ‘각하’께서 말씀하신 촛불 반성 요구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네.

그 건에 대해 반성할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딱 한 명인데, 그 한 명이 반성 안 한 건 분명하지.

절묘한 30년 주기설을 아시나요?

일기장을 찢어버린다고 두 해 전 일이 어디로 사라지나? 심하게 아동스러워요. 천안함 해결 방식도 그래요. 왜 마술쇼 비슷하지 않아요?(웃음) 마술사는 자기 재주의 비밀을 공개 안 하잖아요.

자위권 발동하려 해도 적 군함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잖아. 어디서 들어와서 어떻게 때렸는지 모르는데 어디다 대고 자위권을 발동해? 내가 업자는 업잔가 봐. 정권 바뀌면 또다시 과거사위원회 해야 돼. 이명박 정권이 너무 그걸 많이 만들어.

본론으로 들어가죠. 며칠 전이 5월23일 노무현 1주기였는데, 유난히 무슨 ‘주년’이 많아요. 광주 30주년, 전태일 40주년, 4·19 50주년, 한국전쟁 60주년.

1920년도 기억해야 해. 대중들이 많이 사랑하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된 해. 축하와 기대를 받고 태어나서 저런 짓을 하는구나.(웃음) 30년 주기설이라는 게 있어. 역사에도 아홉수라는 게 있는지 2009년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에 김수환 추기경까지 가셨지. 그 30년 전 1979년에는 박정희가 죽고, 그 30년 전 1949년엔 백범 김구가 죽었지. 그 30년 전 1919년엔 고종이 가셨어. 고종은 왕정, 백범은 독립운동, 박정희는 근대화와 군부독재, 김대중과 노무현은 민주화를 대표하잖아. 왕정에서 독립운동 거쳐서 군사독재와 경제발전을 넘어 민주화까지 온 게 바로 한국 현대사야. 짜고 친 고도리도 아닌데 하필이면 왜 일들이 이렇게 일어나나. 이 얘길 듣고 누군가 그러는 거야. 그럼 이건희 회장은 2039년까지 사시겠구만.(웃음)

어제가 5월27일이잖아요? 광주 시민군이 전남도청에서 최후를 맞이한 날이죠. 그날만 생각하면 진압군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리는 듯해요.

광주가 수많은 인생을 바꿨지. 노무현도 그중 한명이고. 광주가 없었으면 노무현은 지금 부산에서 가장 돈 많이 버는 변호사였을 거야.

광주 하면 또 떠오르는 게 폭도예요. 폭도라는 말이 모욕스럽게, 분노에 차게 맘에 들어요. 동학혁명 이후 처음 민중이 낫 들고 나섰다는 거지.

김남주 시인이 79년에 자금 마련하려고 과도 들고 부잣집에 들어갔잖아. 학생운동권에서 당시 남민전 사건을 어떻게 볼 건지를 놓고 세미나를 했어. 모험주의 어쩌구 하는 말들이 나왔거든. 그래도 그게 지리산에서 빨치산이 깨진 뒤 최초의 무장투쟁 아니냐 했어.(웃음)

‘폭도’라는 말이 정말로 맘에 드는 이유

산적이나 동학의 ‘비적’ 이후 가장 피비린내 나는 봉기였죠. 민주주의란 게 진짜 공짜가 아냐. 그것으로 먹물 중심적 운동을 넘는, 뭔가 과감한 생략을 하고 새로운 단계로 나간 거지. 폭도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분노와 깡으로 무장을 한 거죠.

세계 혁명운동사에서 도시해방 한 게 여러 곳인데 광주처럼 얼떨결에 도시를 장악한 법이 없어. 전략, 전술, 비전, 조직, 프로그램, 이념 아무것도 없이. 광주에서 처음 시작은 학생들이었지만 진짜 나선 사람은 배달의 기수들이었지. 신문배달, 가스배달, 철가방, 그리고 웨이터, 삐끼…. 부마항쟁에서도 그랬어. 박정희가 ‘똘마니’라 부른 사람들.

단박에 깨친다는 말이 있는데, 우연이 필연처럼 왔을 때 순간적으로 사람이 변해. 그게 광장에서의 깨침이지. 이것보다 센 득도가 없어. 저는 80년대 내내 5월만 오면 망월동에 갔어요. 그거 자체가 투쟁이었죠. 망월동 참배투쟁. 수많은 경찰을 뚫고 가야 했으니까. 몇 주년 어쩌고 할 때마다 내가 늘 하는 말이 제사 잘 지내는 놈이 역사에서 이긴다는 거죠.

그전엔 4월마다 수유리 묘지에 자주 갔지. 거긴 너무 쓸쓸해.

수유리 너무 멀어요. 4·19를 너무 멀리 갖다 놓은 거죠. 역사를 유기시켰다고 할까. 항쟁은 시내에서 있었는데 거기다 두면 점차 잊히게 되죠. 민주묘역을 남산이나 광화문에 조성해야 해요.

광주 제사도 서울서 좀 지내야 해. 민주정부 들어서 한번은 서울에서, 한번은 광주에서 지내야 했어.

농 삼아 말하자면 유교·불교가 기독교에 밀린 이유가 있어요. 유교는 1년에 한번, 불교는 한달에 한두번 제사를 지내고, 기독교가 일주일에 한번 이상 제사 지내죠. 몇 주년이란 걸 새겨보자는 까닭이 여기 있어요. 이른바 기억투쟁이죠.

80년대는 정말 귀신에 씐 시대였어. 광주 귀신. 5월마다 귀신들의 홈커밍데이였다고나 할까. 80년대에 맨정신 갖고 그렇게 싸울 수 있었나? 그 짓 하다가 감옥 가고 두들겨맞고 패가망신할 거 알면서.

귀신을 불러내는 노래가 있었잖아. “왜 찔렀지! 왜 쏘았지! 트럭에 실려 어디 갔지!” 그리고 ‘임을 위한 행진곡’. 올해 기념식 때는 못 불렀잖아.

귀신들의 홈커밍데이와 돈다발 퇴마사

귀신 나올까봐 그런 거지.(웃음) 우리는 광주 귀신들이 무섭지 않잖아. 조선후기로 가면 무덤이 집 뒤뜰에 있어요. 원래 무서운 곳이 아니란 말야. 광주 그 처참한 사진이 있어도 그분들이 우리 편이잖아. 꿈에 볼까 무서운 놈들이 있는 거고.

귀신을 내 편으로 삼아 제사 잘 지내는 게 진보라는 걸 광주가 보여준 거죠.

90년대까지 너무 제사가 많았어. 너무 사람이 죽어갔어. 그 귀신에 씌었던 시대야. 그래서 그렇게 잘 싸웠고. 그런데 90년대 들어오면서 달라졌어.

무등산이 낮아진 이유잖아요. 하도 파먹어서.(웃음) 근데 그건 아무리 먹어도 배가 안 불러.

귀신이 보기에는 낮아진 거지.

염병할, 돈 때문이죠. 자본주의 귀신, 돈.

돈이란 퇴마사를 불러들인 거지. 와이에스에게 광주가 계륵이었잖아. 광주를 높이 평가 안 할 수도 없고, 평가하자니 김대중 띄워주려는 것 같고. 그래서 4·19묘지와 마산 3·15묘지를 크게 지었지. 난 광주가 망하게 된 게 돈 풀리면서였던 거 같아.

귀신을 중심으로 돈을 써야 했는데,….

내가 99년에 미국에서 돌아온 다음 제일 낯설게 생각한 게 ‘광주의 전국화’라는 구호야. 언제부터인가 광주가 호남 사람의 광주가 됐고, 남도 사람의 광주가 됐고, 광주 사람의 광주가 됐고, 광주에서도 돈 받은 사람의 광주가 됐고, 그중에서도 돈 많이 받는 사람의 광주가 되니까 “당신들끼리 잘 해보시오” 그렇게 된 거지. 그래 갖고는 안 된다 싶으니까 광주의 전국화를 들고 나왔지.

돌이켜보면 일제에 저항한 광주학생의거가 오늘날 학생의 날 아니에요. 당연히 전국적인 거죠. 근데 그렇게 되지 못했던 거지.

우리가 광주에 미안했던 게 그거 아냐. 광주사람들이 해방광주에서 처벌 안 당하려면 전두환이 집권 못 하는 건데, 그러려면 광주 비슷한 사건이 서울·부산·대구서 터져줘야지. 근데 전혀 소식 없었지. 그 사람들이 가졌을 그 엄청난 고독감.

타이 시위를 보면서 고립무원 광주가 떠올랐어요. 같은 5월인데다. 지도부가 최후에 투항을 했어. 광주는 도청에서 최후를 맞았지. 그래서 이겼어. 거룩한 패배는 역사에서 승리하죠.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지는 것도 중요해. 죽어서 살았지. 죽었으니까 부활했지. 살았으면 연명이지. 제사 잘 지내서, 산 사람들이 잘 싸워서 죽은 사람들이 부활한 거야. 그때 뵈는 게 없었잖아. 이해타산 따지다가도 생각이 광주에 미치면 계산기가 멈춰버리는 거지. 죽는 놈도 있는데 하고.

광주가 사람들 뼈에 사무치게 새기게 된 건 광주비디오 덕분이죠. 전두환이 언론통폐합 뒤 컬러티브이를 제공해줬어요. 그러자 브이시아르(VCR)가 등장했죠. 피는 흑백으론 감도가 떨어지죠. 포르노 보던 브이시아르에서 광주가 돌아갔죠. 전두환 각하는 색을 하사하시고 색으로 망했던 거죠. 한국 사람들 티브이 컬러 바에는 광주 피가 스며 있어요.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이란혁명이 카세트의 혁명이라면. 80년 광주는 비디오 혁명이지. 카세트는 혼자 들어도 비디오는 대개 모여서 보잖아.

‘해방광주’가 대중에게 순식간에 침투될 수 있었던 건 삼성전자 덕분이죠.(웃음) 찌라시도 컬러로 바뀌어갔어요. 그때 광주는 미디어의 최첨단을 달린 거죠.

왜 운동권은 ‘보복’을 생각 못했을까

<화려한 휴가> 감독은 젊은 사람이었지? 광주는 이제 다 파먹은 김칫독이라 생각했는데, 700만명이나 보고 울 줄은 생각을 못 했어.

강풀 만화 <26년>을 읽으면서도 정말 괴로웠어. 제목도 간편해. 걍 <26년>이야. 근데 벌써 30년이네.

나도 <26년> 보다가 못 보겠더라구. 국정원 과거사위 있을 땐데. 위원회만 숱하게 만들고 단 한 놈도 감옥에 보내지 못하고 뭐하나 자괴감 들 때였으니. 왜 운동권은 ‘보복’이란 생각을 못했을까. 민중 근처로 간다 간다 하면서도 범생이 짓만 했구나 하는.

그 만화를 읽으면서 역사에서 징계가 이뤄지지 않을 때, 그 마지막 날 도청에서 어떻게 했던가. 거기서 답을 찾으면 되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만화에서 보면 전두환을 쏘는 게 미진인데 그 아버지가 광주에서 부인 죽고 실어증에 걸린 채 어린 딸을 키웠어. 근데 아버지가 죽기 전 입을 열고는 ‘너는 네 인생을 살아라’ 딱 한마디 하고 죽거든. 아버지는 엄마 인생을 대신 산 거지. 소름 끼치는 대사야. 아, 우리는 정말 고통스런 시절을 산 거지.

거대한 망각을 저격했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 같아요. “26년.” 먹물근성을 향해서도 저격한 거예요.

사실은 우리 역사에서 국가폭력이 허다한데 왜 광주가 특별하냐. 그건 그날 새벽의 도청 때문이야.

광주 5종세트를 꼽자면 ‘폭도, 밥, 분수대, 최후의 도청, 노래’라고 할 수 있죠. 이 5종세트를 요즘 콘텐츠로 다시 창조해내는 게 우리네 숙제예요.

얼마 전 광주에서 시민군 소대장 했던 분을 만났어. 마지막 날 16명을 배정받았는데, 밤 11시쯤 되니까 2명 남았대. 자기도 어머니가 찾으러 왔대. 대학생이 교련복 입고 있으니까 고교생인 줄 알고 지나갔다는 거야.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는데, 왜 남았냐고 물었더니 걍 남았대. 광주에서 배워야 할 것이 “걍 정신”이야. 텅 빈 도청을 어떻게 전두환에게 넘겨주느냐, 그렇게는 할 수 없다 한 거지.

그 새벽처럼 역사에 순결한 장면이 있는 법이거든요. 거룩하게 패배하면 끝내는 반드시 이긴다는 거예요. 도청이 가르쳐준 비밀이죠.

그게 사상으로 된 게 아니라 몸으로 된 거지. 민중이었기 때문에 몸으로 느낀 거지.

문자 좀 쓰자면 거듭해서 기억을 재구성해야 해요. 걍 내버려 뒀는데 게바라가 멋있게 되었겠어요? 뽀샵질도 좀 하고 해서 장사가 되게 해야죠.

도청을 등지고 집으로 간 사람들이 이불 펴 놓고 쿨쿨 잤겠어? 이제나저제나 하는데, 좁은 광주 바닥을 총소리가 뒤흔들고, 오래지 않아 총소리 멎었어. 진압당한 거지. 그 시간이 한국 오천년 역사에서 가장 긴 새벽이었을 거야. 거기서부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시작되는 거지. 그게 돌연변이야. 돌연변이처럼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사로잡힌 놈이 광주의 자식들이 되는 거야.

4·19와 함께 광주는 그렇게 해서 민주화운동과 민중사에서 결정적 근육이 되었어요. 근육은 물론 쓰라고 있는 거죠. 가령 올해 5·18 기념식에서는 영령들을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빼앗겼죠. 이상화가 일제 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그랬는데, 엠비시대에 ‘노래를 빼앗긴 들판에서 똥이라도 치워야/ 쥐라도 잡아야 하는 게 아닌가’를 고민하는 지경이 되었어요.

광주가 역사에서 부활했다, 승리했다 했는데, 지난 30년 동안 단 한번 그걸 의심하지 않았어. 근데 요즘 들어 조금씩 불안함과 미안함이 생겨. 지역아동센터 분들이 불러 강연을 가서 들은 이야기인데, 아이들한테 장래 희망을 쓰라 했더니 정규직이라고 쓴 아이도 있다는 거야. 옛날에는 가난한 집 애들도 대통령이나 과학자, 사업가 된다 했었는데 말이지. 그 마지막 새벽에 ‘걍’ 남은 사람들이 계엄군을 기다리면서 꿈꿨던 대한민국이 있을 것 아냐. 30년 뒤에 아이들이 장래 희망에 정규직이라고 쓰는 거였다면 총 내려놓고 집에 가는 게 맞지. 그게 바로 도청에서 마지막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드는 거 아냐?

극도의 공포가 분노로 바뀌는 건 순간이야

후배들이 더는 혁명가, 운동가가 되겠다고 꿈을 꾸는 세상이 오질 않길 빌었죠. 평범한 시민으로 사는 게 자랑이길 바랐어요. 그게 소싯적에 데모 열심히 한 핵심 이유 가운데 하나였는데, 젠장 이걸 물러야 할지도 모르겠어. 일수불퇸데. 지난 30년 동안 광주는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약이었어요. 부러 그 약효를 제거해버리겠다는데 어떻게 울화가 치밀지 않겠어. 올해처럼 그 약이 쓴 적이 없어요. 도청에 남은 형들에게 부끄러운 거지.

유모차 엄마 잡아가고, 미네르바 잡아가고 하면서 저들이 우리에게 주려는 게 공포야. 그런데 광주를 봐, 극도의 공포가 분노로 바뀌는 게 정말 순간이거든. 많이 누적이 돼가는 것 같아.

요새 전쟁공포를 팔아대고 있으니, 거의 마지막 상품이 진열대에 오른 거죠. 공포는 마약과 같아서 뽕을 더 세게 쳐야 하거든. 곧 가게 물건이 가짜라는 걸 알게 되면 손님들이 가만히 있지 못하는 법이죠. 조금 더 있으면 노래방 기계에서 ‘솔아 솔아’가 슬며시 빠지지 않을까?(웃음)

흔히 기억되지 못하는 죽음을 개죽음이라 하지만, 기억만 하고 제사만 지내면 뭘 해? 산 놈들이 제대로 해야 죽은 자들이 빛나지. 도청에서 최후를 맞은 사람들을 개죽음으로 만들지 말아야 해.

동학 때 봉준(전봉준)이 형네들은 낫을 갈았고, 광주 도청 형들은 총을 들었고, 우린 무얼 해야 하나. 그렇죠. 펜대 꼬나잡고 주둥이 제대로 놀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죠.

■ 한홍구의 출사표

당신이 총을 들지 않았다면…

김지하가 <오적>을 써서 망해가던 <사상계>를 폐간시켜버린 것도 딱 40주년이다. 그때 김지하는 “에라 모르것다,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시(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라고 거침없이 내뱉었다. 우리도 비슷한 심정이다. 다른 게 있다면 그때 김지하는 뵈는 게 없는 갓 서른이었고, 지금 서해성하고 난 볼 꼴 못 볼 꼴 다 봐가며 쉰 줄에 들어섰다는 거다. 아, 또 한 가지, 한겨레가 좀 어렵긴 해도 <사상계>처럼 망해가는 처지는 아닐 터.

오늘의 화두는 광주다. 80년대 내내 우리를 짓누른, 그러나 우리도 결단코 피하지 않았던 고통스러운 문제. 지난 10여년 민주정권의 거짓 ‘태평성대’에 우리가 잊어버렸던 질문을 다시 꺼내든다. “그 새벽 도청에 있었다면 난 총을 들었을까?” 이 난은 별걸 다 기억하는 역사학자 한홍구와 별걸 다 기억하는 역사학자보다 더 많은 걸 기억하는 서해성이 지식인의 껍데기를 벗어던지는 자리다. 지식인이란 그날 새벽 도청에서 총을 들지 않은, 않아도 되는, 않았어야 하는 이유를 1초에 7836가지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발휘하기 마련이니까.

꼭 총을 들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총을 든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만은 간직하고 살자는 얘기다. 너무나 많은 이론과 정보를 탐하느라 고슴도치가 아는 딱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놓쳐버린 어리석은 여우가 되지 말자는 얘기다.

서해성과 한홍구는 이상하게 역사와 세상을 보는 궁합이 맞는 과다. 예컨대 이런 거다. 1991년 참 끔찍한 ‘분신정국’ 때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고도 왜 졌는가 결론을 “그때 애들만 죽어서 그래”라고 내리는 식이다. 그 둘이 무슨 병에 걸렸는지 갑자기 쥐를 잡자고 나섰다. 아마도 어린 시절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가르침을 너무 충실히 접수한 탓인가 보다. 이 난은 한홍구와 서해성이 서로 싸우는 자리가 아니다. 독자 여러분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 쥐를 잡는 게 가장 효율적인가 논쟁하는 것을 기대하지 마시라. 쥐약이면 어떻고 쥐덫이면 어떻고 고양이를 키운들 어떤가? 단, 쥐를 없애려면 우리 주변부터 청결히 해야 한다. 같이 놀고, 같이 싸우고, 같이 쥐 잡자.

※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와 서해성 작가가 함께 펼치는 ‘직설’은 금요일마다 연재됩니다. 독자 여러분의 반론과 대화주제 제안도 환영합니다. 보내실 곳 opini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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