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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혜신 마음] 내 마음은 숨어있지 않다

등록 2010-06-09 21:24수정 2010-06-09 21:27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해적들이 많아지면서 소말리아 인근 해상에서는 군함을 공격하다가 붙잡히는 해적도 생겨나고 있단다. 군함을 상선으로 착각해서 생기는 일인데 착각의 이유가 흥미롭다. 해적들로선 큰 배를 납치할수록 뜯어낼 수 있는 돈이 많아지니 그것이 군함이든 상선이든 큰 배만 보면 돈다발이라는 생각이 앞서서 그런 어이없는 일을 벌인다는 것이다. 과도 한 자루 들고 전투태세를 갖춘 특공부대를 털겠다고 뛰어드는 격이다. 자기 이익이나 목표에만 집중하다 보면 언제든 그런 일이 생긴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본 대로만 행동하니 당연한 결과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숨은 표’ 논란을 촉발한 정부여당과 일부 언론의 행태가 바로 그렇다. 사람들의 실제 의견과는 상관없이 자기들에게 불리한 이슈나 사실은 쏙 빼놓고 자기 진영의 카르텔을 형성해 착시현상을 심화시켰다는 비판은 타당하다. 그래 놓고 언제부터 그런 게 있었냐는 듯 ‘숨은 표’의 의미에 눈을 동그랗게 뜬다.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하기 전부터 사과는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그 시점부터 사과가 땅에 떨어지기 시작한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행위는 삼류 코미디이거나 무지의 소산이다.

게다가 ‘숨은 표’의 의미를 정부여당의 성실성과 치적이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대목에 이르면 할 말을 잃는다. 아무리 국정운영의 중대 기조가 홍보지상주의적이란 평을 듣는 정부라 해도 이 정도면 중증이다. 여론조사 기관의 신뢰도를 걱정하며 ‘숨은 표’를 찾아내기 위한 선진 조사기법의 도입을 역설하는 언론의 행태도 화를 북돋우기에 손색이 없다. 언론이 여론조사가 아니라 여론조작을 한 셈이 되었다는 비판에도 아랑곳없이 하마를 지목하며 입을 오므리는 입 큰 개구리처럼 당사자가 아닌 양 처신한다. 정부여당은 국민을 마음 없는 유령인간 취급하고 동조언론은 발맞춰 계몽한다.

이번에 투표한 유권자는 2200여만명이다. 그중에는 자신이 찍은 후보가 당선된 유권자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고 애초에 당선권 밖에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특정 후보를 지지한 유권자도 있다. 어떤 경우든 개별적 사연이 존재하는, 존중받아 마땅한 나의 권리다. 배우 송강호의 말처럼 천만 명을 설득하는 힘과 한 명을 설득하는 힘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정부, 정치인, 여론조사 기관, 언론은 ‘나’라는 개별적 존재가 가진 속마음은 도외시한 채 2200만이라는 거대한 무리의 무색무취한 분자로만 ‘나’를 취급한다고 나는 느낀다.

한 명을 앞에 놓고 진지하게 눈을 맞출 타이밍에도 천만 명을 대상으로 연설하듯 공허한 제스처를 멈추지 않는다. 그런 이들에겐 ‘숨은 표’가 늘 의외일 수밖에 없다.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위축된 현재의 사회적 환경이나 침묵의 나선이론 같은 심리적 이유 등도 ‘숨은 표’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지만 내가 보기에 가장 결정적인 것은 ‘나’를 집단의 한 구성분자로만 취급하는 ‘그들의’ 촌스러운 인식이다. 나는 마음을 숨기고자 한 적 없는데 자기들 필요에 의해서 숨은 표로 취급하고 또 스스로 놀란다. 나에 대해 말한다면서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본 것이 전부인 양 목소리를 높인다.

9·11 테러가 발생하기 직전 의미심장한 정보보고가 있었다. 한 항공학교에서 비행기술을 배우면서 착륙 방법을 배우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착륙 방법을 배울 필요가 없었던 그 훈련생은 조종 자격을 딴 후 비행기를 몰고 빌딩으로 돌진했다.

위험신호는 언제나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들이 외면하거나 왜곡할 뿐이다. 이번 선거의 ‘숨은 표’ 논란은 그런 위험신호의 하나로 보인다. 자신의 욕망에만 집중하다 보면 서너 명이 개인화기 몇 점 들고 중무장한 군함을 공격하는 어처구니없는 해적 신세가 된다. 결과는 몰락이다. 국민의 마음, 민심이란 그런 군함 같은 것이다.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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