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서해성의 직설] 제6화 한나라당 쇄신 가능?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직설’ 현장이 후끈 달아올랐다. 말문을 연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의견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나라당 개혁·쇄신운동이 그동안 말짱 황 아니었냐”는 지점에서 목소리의 높이와 속도가 가장 격렬해졌다. 게스트의 눈꺼풀은 파르르 떨렸고, 한홍구의 얼굴은 시뻘게졌다. “잠깐만요.” “아니, 말 끊지 마시고요.” “아니, 그게 아니라.” “제 이야기 듣고 말씀하시라니깐요.”
오늘은 한나라당 쇄신파의 대표주자로 불리는 초선 김성식(52) 의원이다. 민주당 천정배 의원,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에 이어 정치인 시리즈 3탄. 김 의원은 1986년 제헌의회 사건으로 2년간 옥살이를 했던 민주화운동 리더 출신이다. 잠시 민중당에 몸담았다가 고 제정구 의원과 함께 1997년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제2정책조정위원장과 경기도 정무부지사를 거쳐 두번의 낙선 끝에 2008년 서울 관악갑 선거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했다. 예리한 정책대안 제시로 여러 차례 국정감사 베스트 의원에 선정됐고, 현재 당내 초선들의 쇄신파 모임인 민본21을 이끌고 있다.
김 의원은 당내 쇄신운동의 힘이 한나라당 변화의 동력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명박 정부 이후 ‘황당한’ 민주주의의 퇴행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인정했고 함께 분노했다. 한나라당은 바뀔 수 있는가. 한홍구·서해성은 김 의원을 격려했지만 의심의 눈초리를 완전히 거두지는 않았다.
진행·정리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서해성(이하 서) 김 의원 누리집에 “보수대혁신이 살길”이라고 써놓았더군요.
김성식(이하 김) 보수란 건강한 책임과 함께, 래디컬하지 않은 방식의 자기변화를 의미하는 거 아닌가요. 두 분은 참 래디컬한 것 같은데.
한홍구(이하 한) 1986년 제헌의회 사건으로 옥살이를 했죠? 거기 비하면 우리 두 사람은 정말 온건하기 짝이 없죠.(웃음)
서 한나라당 의원을 모셨습니다. 쇄신파 맞죠?
한 최근 한 신문 사설을 보니 쇄신파를 향한 재밌는 메시지가 있더군요.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라.” 칼 뽑고 뭘 했습니까?
김 시작 단계죠. 항상 쇄신과 개혁에는 거스르려는 흐름이 있기 마련이죠. 혼선 속에서 울퉁불퉁한 과정을 거치고 있어요.
비서실장 교체, 왜 그리 오래 걸리나
한 이전에도 한나라당엔 수요모임, 미래연대 등 초선들의 쇄신모임이 있었어요. 개혁, 쇄신, 정풍 좋은 말들을 다 했는데 된 건 없지 않았나요?
김 21세기는 쾌도난마식 혁명이 아닌 다양한 개혁의 축적이 필요한 때입니다. 시대에 맞지 않게 지도부에 있던 사람들이 쫓겨났고 아주 우파적 시장경제 관점으로 돼 있던 정강정책도 많이 바뀌었어요.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꿈틀거리는구나 느낄 만했다고 봅니다. 그게 대선 압승의 베이스가 된 셈이고.
한 김 의원도 “한나라당에 수꼴(수구꼴통) 유전자가 있다”고 했어요. 유전자라는 건 절대로 안 바뀌는 거 아닙니까. ‘원판불변의 법칙’이 있지 않나요?
김 쇄신운동의 한계를 지적하자면, “한 게 뭐 있냐”가 포인트가 아니죠. 쇄신운동 제대로 하려면 스스로 공천의 위협에서 벗어나야 돼요. 나는 그렇게 할 겁니다. 쇄신운동이 강하게 이뤄지려면 계파모임에서 1년이라도 다 탈퇴해야 해요.
서 가능성도 낮고, 현실성이 없지 않나요?
김 쇄신운동의 결과로, 대통령이 티브이 연설 통해 국정기조 재점검하겠다고 했어요. 젊은 정당 만들겠다고 했고. 당 사무총장을 관례대로 지명하는 것에도 브레이크를 걸었죠.
서 쇄신 정풍을 접하면서 ‘엠비로봇설’을 생각했어요. 정권의 구색 맞추기에 쇄신을 끼워넣어 함께 팔아먹는 거 아닌가 해서요. 현재 쇄신파들이 주로 초선인데, 정치쇼로서 관객을 동원할지는 몰라도 정치권력의 성질이나 성격을 바꿀 수 있는가 하는 거죠. 그런 점에서 쇄신파들이 품고 있는 거하고 실제하고는 격차가 크지 않나요?
김 격차 인정합니다. 실제로 황당한 일 많이 벌어지고 있죠. 모 경찰서에서 고문사건이 났어요. 당장 책임자 직위해제해야죠. 저도 안기부에서 57일 동안 두드려 맞은 사람이잖아요. 주춤할 게 뭐가 있나요.
한 쇄신, 쇄신 하는데 진짜 쇄신 대상은 참모가 아니라 엠비 아니냐는 거죠. 근데 쇄신파는 지금 이명박 대통령이 한마디 하니까 깨갱하고.
김 그런 표현 쓰지 마세요. 대통령은 바뀌어야 합니다. 얼마나 바뀔지는 조금 회의적이에요.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최소한 대통령 주변의 참모들이 직언하지 못하고 있고, 자기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과 싸워야 한다는 거죠.
한 가시적인 쇄신의 기준이 어떤 겁니까?
김 현재 대통령 비서실장이 사의를 표명했어요. 나는 그분이 빨리 집에 가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죠. 비서실장 교체하는 데 무슨 시간이 그렇게 걸리나 몰라요. 일부 청와대 참모들은 노골적으로 쇄신 흐름에 방해를 놓고 있고.
서 진보니 보수니 떠나서 실망감을 준 청와대 핵심 참모들이 있어요. 민주화운동 출신에게 모종의 중요한 역할을 기대하는 게 무리만은 아닐 텐데요.
김 김대중 정부든 노무현 정부든 대통령 고집 못 꺾은 건 마찬가지예요. 87년 체제 아래선 대통령이 당선되는 순간부터 국민이 아니라 역사와 대화하겠다고 하거든요.
한 지난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이 있었어요. 정치검찰이 개입을 했고. 이명박 대통령은 퇴임 뒤에 무사하리라고 보는지요.
김 돈에 의한 비리를 저지르지 않는 한 무사하지 못할 게 없죠. 그건 선입견이에요. 외국선 보수세력이 민주화 추진하지 않았나요. 우리나라에선 반대입니다. 5·18 30주년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못 부르게 한 황당한 일이 벌어졌어요. 민주주의에 대한 보수의 역사인식은 천박해요. 긍정적 자산으로는 가난의 질곡 벗어나게 한 거죠. 최초 문민통치, 북방정책, 남북기본합의서도 보수정권 시절에 이끌어냈어요. 지금은 전향적인 게 없어지고 있죠.
‘쇄신=민주화세력’ 등식에 동의할 수 없어
서 쇄신파 분포가 다양하죠? 구 민주계, 구 민중당, 또는 개별적으로 입당한 이들까지.
김 6·2 지방선거 뒤의 자각이 쇄신 흐름을 만들어낸 거죠. 쇄신파 51명 명단을 보면 알 겁니다.
서 한나라당이 민정당과 공화당 잔재를 청산했다 주장하지만 ‘수꼴’ 기질은 엄연히 있지 않나요. 그들이 현역은 아닐지라도 완전히 청산된 적도 없지요.
김 그게 장애이기도 하고 강점이기도 하죠.
서 강점은 뭐죠?
김 앞으로 한나라당이든 민노당이든 자기 나름의 중심성에서 얼마나 많은 다양성을 포괄해내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화이부동. 똑같은 게 아니라 똑같지 않기 때문에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거죠.
[한홍구-서해성의 직설] “민주주의 퇴행, 내가 봐도 황당하다”
한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변화하면서 민정계가 안 남을 정도로 바뀌었다지만, 바깥에서 보면 호박이 줄 긋는다고 수박 되냐는 거죠. 예컨대 쇄신파 51명 중엔 법원이 금지결정 내리자 전교조 명단 공개에 동참한 의원들도 있지 않나요?
김 6·2 선거 민심만 민심이고 대선 민심은 민심이 아닌가요? 국민들은 더 변화되는 정당에 기대를 겁니다. 그렇지 못하면 사정없이 심판하는 겁니다. 그런 측면을 봐야지 말짱 황이라고 하면 지나치죠.
한 한나라당이 거대한 블랙홀 같다는 거예요. 민주화운동 했던 사람들이 한나라당에 가서 왜 다 그 모양이냐, 뭔가 달랐어야 하지 않느냐는 거죠. 미디어법 처리 때 김 의원도 몸싸움 같이 하지 않았습니까.
김 할 말이 많지만, 미디어법 경우에도 정부 원안을 엄청 수정했어요. 덧붙여 ‘쇄신=민주화운동 세력’ 등식에 동의할 수 없어요. 쇄신의 동력은 디지털시대에 빨리 적응한 사람들이죠.
한 건강한 보수의 기준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김 무엇보다 자기희생 정신이 필요하고, 진보보다 적극적으로 공정성과 투명성 가치를 위해 싸워야 해요. 한나라당 개혁하는 게 한국 정치 개혁하는 길입니다. 설사 시지프스의 돌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서 그럼에도 여전히 한나라당이 쇄신되었다거나 하는 느낌을 받기 어려워요. 무엇보다 당장 피부로 느끼고 있는 민주주의의 퇴행 때문이죠.
김 일리 있어요. 디지털 시대는 작은 것이 사소한 시대가 아니잖아요. 금방 전파되고 강한 힘을 갖죠. 이런 것에 대한 이해가 없어요. 김제동 퇴출이나 4대강과 세종시 문제에 대한 처리방식을 보면 국민을 진정한 주권자로 바라보는 문제의식이 취약해요.
한 그렇게 민주의식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21세기에 집권할 자격 없는 거 아닌가요?
김 여러분 눈으로 볼 땐 기성정당이 다 성에 안 차겠죠. 낡은 진보와 낡은 보수는 동전의 양면으로 적대적이면서도, 서로가 존재의 근거이죠. 여든 야든 심판받았을 때 잘해야 하는데 답답한 거죠.
서 참여연대 앞에서 ‘가스통’ 위협, 거기서 사적 폭력이 백주에 활개 치고 있는데 국가권력은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나요?
김 전쟁 경험 세대가 북한 두둔하는 듯한 모습에 알레르기 반응 보이는 거죠. 보수냐 진보냐를 넘어서 삶의 다양한 곡절을 끌어안는 정치세력의 포용성이 숙제라고 봐요. 참여연대가 사실을 적시하고 비판하는 수준에 머물렀어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사적인 폭력은 안 되죠. 진보적 시민운동 하는 분들일수록 세대적 의식의 단절현상을 소화하면서 좀더 보편적인 진보의 가치로 끌어내는 게 중요합니다. 여기에 대한 성찰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참여연대 폭력사태는 시민간의 충돌?
서 다른 의견 표현하는 게 문제가 되어선 민주사회라고 하기 어렵죠. 시민단체가 유엔에 이메일 보낸 건 천안함 진실을 밝히는 과정의 투명성이 확보되지 않아서 다른 의견을 개진하는 것 아닌가요.
김 문제의 핵심은 국제적인 조사결과로 밝혀진 내용에 대해서 전문성을 뒷받침할 만한 조사결과를 내놓지 못했다는 거죠. 북한 소행이라는 결론을 뒤엎을 만한 명료한 근거를 내놓지를 못해요.
한 정보 접근이 불가능한 일개 시민단체가 그걸 어떻게 뒤집나요? 참여연대는 정부 발표가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정부의 설명에 대해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한 것일 뿐이에요.
서 다른 이야기로 가죠. 두 사람이 하도 열을 내서 이야기하는 바람에 제가 사회를 다 보네요. 엠비정권 이후 자사고, 특목고 등 어린 학생들의 미래까지도 차압당하는 걸 보면 참으로 안타까워요. 엠비는 경제대통령이라면서 “부자 됩시다”라고 했지 “민주주의 잘하겠습니다”라고는 안 했거든요. 잘 먹고 잘살게 해주겠다고 해서 사람들이 찍은 거죠.
김 그것보다 당시 노무현과 여권에 대한 실망, 심판이라고 해야지.
서 근데 경제가 잘 안됐다는 거죠. 4대강, 세종시 그렇죠. 주요 시민단체 압박이나 박원순 변호사 활동에 대해 국정원 개입설, 유엔 인권조사관 미행, 인터넷을 포함한 언론과 인권 위기, 집시법 등에 대한 편의적 적용…. 그런 걸 통째로 합쳐서 말해보자면 이명박 대통령은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비유와 풍자를 하는 건데, 양복 입은 전두환 같지 않은가요? 김 의원이 보기에 엠비는 어떤 사람인가요?
김 오랫동안 기업 경영한 분이죠. 기업 경영 마인드가 국정에 반영되는 거죠. 주권자인 국민이 민주주의의 기초잖아요. 그런 문제를 깊이 성찰하고 국정운영해야 하는데.
서 답을 해야죠. 캐릭터로 볼 때 이명박은 누구냐.
김 시이오 출신의 대통령.
서 심심해요.
김 규정을 잘해야 해법이 나오지 않나요?
한 그만큼 권력자가 야비하다는 거죠. 촛불집회에 유모차 끌고 나온 엄마들이 검찰에 소환되고, 미네르바가 잡혀가고. 이게 이명박 정권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아까 화이부동을 말했는데 문제는 왜 한나라당 안에서만 그러냐는 거죠. 참여연대가 다른 의견 제시했다고 가스통 들고 와서 협박한다면 그게 대화와 소통의 정치인가요?
김 시민끼리의 충돌이죠.
서 시민끼리의 충돌이라는 말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자 접근입니다. 그럼 용산참사는 삼성물산과 세입자 둘 사이 문제이기만 한가요?
김 시민단체나 억울한 일 당한 국민 입장에서 같이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민주주의 성숙 문제를 고민해야 할 시점입니다. 국민적 시각에선 지나친 쪽이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목적의 정당함을 넘어.
서 정치인 엠비야말로 87년 체제의 산물이거든요. 시민이 데모를 통해 절차민주주의를 확보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대통령 됐겠어요.
김 자각해야 한다는 지적은 중요한 이야깁니다.
서 2년 반 동안은 너그러움이 전혀 없었어요.
김 그래서 중도실용 안 믿게 된 거예요.
서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는 아직까지는 ‘양복 입은 전두환’이라는 거죠.
김 관용이 적었고 민주주의 시대의 진전에 대해 개념이 부족했고 성찰이 부족했죠. 지속적으로 문제제기 해야 하는 거구요.
서 광우병이 정말 괴담이라고 생각하나요?
김 피디수첩 땜에 촛불시위가 생겨났다고 보는 황당한 주장들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서 피디수첩 때문에 촛불집회가 생긴 것은 아니라는 것인가요? 분명히 말해 주세요.
김 그동안 뼛조각 하나 갖고 난리치다가 갑자기 아무런 설명 없이 30개월 이상 국제적으로 논란이 있는 부분을 받아들여 검역주권 행사하는 데 문제가 생겼고, 그래서 재협상까지 갔던 거 아닌가요. 거꾸로 피디수첩 내용이 다른 측면에서 사실에 부합하느냐는 별도의 문제로 남습니다. 촛불집회는 소통 없고 설명 없음에 대한 저항이었다고 생각해요.
서 촛불집회의 정당성에 동의하는 거군요.
김 그렇죠. 촛불시위는 쇠고기 수입 과정을 제대로 핸들링하지 못한 사람들이 초래한 거죠.
대통령의 촛불집회 반성 요구는 오버
한 얼마 전 대통령은 촛불집회 참가자들의 반성을 요구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김 촛불집회 반성 요구는 오버라고 봐요.
한 마무리할 시간이 다 됐네요. 쇄신파로서 칼을 뽑았는데, 부끄럽지 않게 끝까지 책임지기 바랍니다.
김 최선 다해야죠. 뭐라고 뻥칠 상황이 못 됩니다.
서 저는 참여연대에 대한 정권과 보수세력의 반응과 대응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건 전형적인 매카시즘적 폭력이거든요. 세대적 차이 이해한다는 것과 행동이 용납된다는 건 커다란 차이가 있죠. 그런 걸 최소한 권력 내부에서 막아야 한다는 거죠. 그게 쇄신파 존재 이유의 기초죠.
김 격려에 답하면서 한 말씀 하겠습니다. 보수나 진보나 그 자리에 머물면 퇴보합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변화 속에서 어떤 새로운 민주주의와 행복의 조건을 진전시키느냐예요.
서 그게 특히 민주화운동을 하다 다른 길을 간 사람들의 자기 정당화 논리로 머물지 않길 바랍니다.
한 내가 죽기 전에 존경할 만한, 신뢰할 만한 보수를 만나고 싶어요.
김 방금 주신 말씀이 한나라당 쇄신의 의미이자 방향이죠. 한마디로 투표율 낮기만을 기대하는 정치는 창피합니다. 보수는 자산을 잃었어요. 자산을 새로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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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설잔설
호랑이는 없다
이 땅에서 호랑이는 갑작스레 사라졌다. 호랑이를 본 적 없는 왜인들은 사냥단을 모아 건너와 조선 호랑이 사냥으로 식민지배의 기세를 올렸다. 이용악의 시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에 나오는 아롱범(점박이범, 표범)도, 늑대도 자취를 감췄다. 우라지오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이른다.
분단 공간에 사는 한국인을 일러 자루 속에 든 신세라고 하는 게 어긋난 말만은 아닌 줄 안다. 분단 생태계와 함께 대륙형 인간형이 소멸한 건 우연이 아니다. 호랑이 설화도, 백두산 호랑이니 지리산 호랑이니 하는 말로 통하던 사람들도 만날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육식 맹수가 멸종된 땅에 잡식·초식동물들이 먹이사슬의 중심에 오른 건 불행히도 자연스러운 일일 게다.
죽어버린 호랑이는 정치인들의 입을 통해 이따금 살아났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는 민정당·자민련과 3당 합당을 하면서 말했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상당수 사람들이 자신들을 포함한 주권자인 국민을 사납게 억압해왔던 ‘꼴통’들의 굴로 들어가면서 거의 같은 말들을 남겼다. 이재오, 김문수…김성식들이다.
어떤 이는 애초 주인보다 더 꼴통이 되었고, 더러 굴 깊은 자리에 주저앉아버려 원판마저 알아볼 수 없게 됐다. 인권 억압, 민주주의의 퇴행 등으로 봐 적어도 그들이 말하는 호랑이는 참 호랑이라고 하기는 어렵겠다. 귀엽고 고운 아롱범일 리도 만무하다. 여기서 말하는 호랑이란 공동체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가치일 터이다. 그저 대권, 국회의원 배지를 얻고자 한 말들이라면 호랑이로 표상되는 가치에 대한 모욕이다.
그들은 모두 호랑이 굴로 들어간 뒤 나오지 않았다. 호랑이 굴을 찾아간 자는 귀환 의무를 지고 있거나 호랑이 굴을 말끔히 청소해내야 한다. 그런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혹시 그들이 자기 마음속에 호시탐탐 노린 채 살고 있던 호랑이에게 스스로 물려간 건 아닐까. 틀림없는 건 아직까지 그 굴에 호랑이는 없다는 사실이다.
서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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