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여운형 / 이재성

등록 2010-07-18 20:49

이재성 기자
이재성 기자
“다나카: 우리 일본은 천하무적의 육군이 수십만이고 팔팔함대가 사해를 달리고 있다. 이런 천하막강의 군대와 한번 전쟁해볼 용기가 있는가? 만일 조선인들이 끝까지 반항한다면 2천만 정도의 조선인들이야 일시에 없애버릴 수도 있다.

여운형: 그대도 글을 읽은 사람이면 ‘삼군을 거느린 장수의 뜻은 빼앗을 수 있지만 필부의 뜻은 빼앗을 수 없다’는 말의 참뜻을 알 것이다. 2천만명을 일시에 다 죽일 수도 있고 여운형의 목을 일순에 벨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2천만명의 혼까지 죽일 수는 없을 것이고 여운형의 마음까지 벨 수는 없을 것이다. 호화롭기로 이름난 ‘타이태닉호’는 100분의 9밖에 안 보이는 빙산의 눈에 보이는 부분만이 전부인 것으로 얕잡아 보고 돌진하다가 물밑의 거대한 빙산에 부딪혀 파선을 당했다. 3·1 독립만세는 곧 물 위에 보인 빙산과 같을 따름이다.”

3·1 운동의 만세 소리가 잦아들던 1919년 11월, 상하이(상해)임시정부 외무부차장을 지낸 34살의 여운형이 적진의 심장 도쿄에서 일본 육상(육군장관)과 나눈 대화다. 여운형의 일본행이 일제에 매수됐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던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는 나중에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고 정정했다.

여운형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다.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최초로 번역했으나 끝내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며 조선호텔에서 미군 장교들을 만났지만, 미군정 포고령을 무시하고 38선을 넘나들며 김일성을 만났다. 변절자, 기회주의자라는 비난도 숱하게 받았다. 어느 쪽도 아니었기 때문에 생긴 오해이리라. 좌우합작과 남북연합을 동시에 추진하던 그는 극우파 암살범이 쏜 총탄에 유명을 달리했다. 1947년 7월19일, 63년 전 오늘의 일이다. 갑자의 세월이 지나도록 우리는 그가 남긴 숙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