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성 기자
걸출한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로만 폴란스키의 삶은, 그의 영화가 그러한 것처럼, 격정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유대인인 그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망했고, 8살이던 폴란스키만이 극적으로 게토를 탈출했다. 1969년에는 만삭이었던 배우 출신 아내 샤론 테이트가 살인마 찰스 맨슨을 추종하는 일당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됐다. 1977년 폴란스키는 영화배우 잭 니컬슨의 할리우드 집에서 당시 13살인 소녀 모델 서맨사 가이머에게 샴페인과 진정제를 먹이고 성추행한 혐의로 체포돼 교도소에서 42일 동안 복역한 뒤 풀려났다. 추가 복역 명령이 떨어질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그는 최종 선고 몇 시간 전에 프랑스로 도망갔다. 30년도 더 지난 지금도 미국은 그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한 상태다.
올해 베를린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영화 <유령작가>는 그가 미국을 얼마나 혐오하는지 엿볼 수 있는 텍스트다. 토니 블레어를 연상시키는 전직 영국 총리 애덤 랭(피어스 브로스넌)의 자서전을 대필하게 된 ‘유령작가’(유언 맥그리거)는 랭이 옥스퍼드 재학 시절부터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장학생이었다고 의심한다. 미국의 ‘더러운 전쟁’을 도운 혐의로 랭은 곧 전범으로 기소될 위기에 처하는데, 유령작가의 이 합당한 의심만이 랭이 ‘미국의 푸들’이라는 비아냥에도 아랑곳없이 전쟁에 적극 동참했던 이유를 설명해주는 듯하다. 그러나 유령작가는 비명횡사한 자신의 전임자가 그랬듯이 점점 옥죄어오는 미행과 공포에 몸서리친다.
블레어 전 총리가 자서전 출간을 기념해 다음달 열기로 한 사인회 행사가 과도한 통제로 빈축을 사고 있다. 혹시 영화 <유령작가>의 영향 때문일까? 폴란스키를 넘겨달라는 미국의 요청을 끝내 거부하고 있는 (영국을 제외한) 유럽 국가들은 예의 정치적 파장을 즐기려는 것 같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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