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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한국 외교를 갉아먹는 자들 / 박찬수

등록 2010-09-08 19:37수정 2010-09-08 21:08

박찬수  부국장
박찬수 부국장
유명환 장관은 상황 판단이 빠르고 영리한 사람이다. 대개 1년 남짓이면 바뀌는 외교부 수장 자리를 2년7개월이나 장수한 데엔 이런 성향이 한몫했다. 그가 지난 7월 하노이에서 “젊은 애들이 그렇게 (북한이) 좋으면 김정일 밑에 가서 살아야지”라고 말했을 때, 적지 않은 정치권과 외교부 인사들은 ‘실언이 아니라 계산된 발언’이라고 분석했다. 개각을 앞두고 정권 핵심부의 정서에 확실하게 부응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추측이 맞는지 확인할 순 없지만, 어쨌든 “역시 유명환!”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유 장관이 딸의 특채 문제로 허망하게 물러난 건 뜻밖이다. 어떻게 장관 재임 중에 자기 딸을 특채로 뽑을 생각을 했을까.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이 사건이 보도된 뒤 그의 태도였다. 그는 “장관의 딸이니 더 공정하게 심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뭐가 잘못이냐는 투다. 나중에 청와대 기류를 전해듣고 딸의 채용을 취소하겠다고 황급히 발표했지만 상황을 돌이킬 순 없었다. 누구보다 처신에 능했던 그가 왜 그랬을까. 그를 잘 아는 전직 외교부 간부는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 수십년간 외교부에선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과거 장관들은 더한 일도 했다. 그걸 옆에서 죽 지켜본 유 장관은 딸을 특채하는 게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외교부 특채 직원의 상당수가 전·현직 고위간부 자녀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과거 어느 장관은 아들의 외무고시 준비를 위해 부내에 태스크포스까지 꾸려 예상문제를 뽑게 했다는 일화나, 연수 대상이 되지 못한 아들을 미국에 연수 보내기 위해 해외연수 규정을 아예 바꿔버렸다는 고위간부의 얘기는 외교부에서 전설처럼 떠돈다. 그런 전임자들에 비하면 학력과 경력을 갖춘 딸을 특채한 게 뭐가 문제인가…, 유 장관은 억울해할지 모른다.

외교부 장관의 인사권은 다른 부처 장관들보다 훨씬 막강하다. 재외공관이 많아 인사 수요가 일반 부처의 2~3배에 달하기 때문이다. 부모의 음덕으로 입부한 직원들은 대개 영사과를 거쳐 북미국, 그다음엔 워싱턴 주미대사관으로 나가는 게 ‘공식 코스’다. 능력은 있지만 ‘빽’이 없는 인재들은 변방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능력 있는 사무관과 빽 있는 사무관 중 누구를 워싱턴에 보낼 것인지를 두고, 간혹 인사위원회에서 논란이 벌어질 때가 있다. 그때 최종적으로 ‘빽 있는 사무관’을 낙점하는 건 장관이다.

미국 국무장관이 몇몇 고위직 인선만 챙기고 나머지 중하위직은 부서장에게 거의 맡기는 데 비해, 한국 외교부 장관은 워싱턴으로 가는 말단 사무관 인사까지 직접 챙긴다. 그게 힘이고 권력이라 생각한다. 과거 어느 장관은 집무실 책상 위에 직원 명부를 항상 놓아두고 틈날 때마다 인사 구상을 했다고 한다. 그러니 큰 틀의 외교 비전이나 정책구상을 할 시간이 없다는 게 우스갯소리만은 아니다.

업무보다 인사를 중요시하고 그걸 전횡하는 관행이 수십년간 뿌리내린 곳, 외교부의 이런 현실이 장관 딸 특채 파문을 불러온 근본 원인이다. 정실과 인맥에 따른 인사는 조직의 업무능력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그런데도 수십년간 이런 관행이 지속돼온 건, 외교부 업적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외교의 상대는 주로 외국 정부다. 외교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노출이 쉽지 않다. 한-미 정상회담에 여러 차례 배석했던 전직 주미대사는 “정상회담장 분위기와 언론에 공개된 공동발표문의 내용이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하고 처음엔 놀랐다”고 말했다. 상대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는데도 국내에선 ‘서로 협력하기로 했다’ ‘갈등은 없다’는 식으로 말하면, 얼마든지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릴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식으로 청와대에 잘못된 보고를 올려 대통령 판단을 흐린 사례가 과거에 여럿 있다.

장관 딸의 부정선발은 취소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오로지 인사에만 올인하는 외교부의 고질은 어떻게 도려내야 할까. 그 병폐가 사라져야 한국 외교가 바로 설 수 있을 텐데, 장관이 바뀌어도 그건 쉽지 않아 보인다.


박찬수 부국장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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