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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공정한 사회’와 정당성의 위기 / 우석훈

등록 2010-09-15 18:56수정 2010-09-16 11:54

우석훈 2.1연구소 소장
우석훈 2.1연구소 소장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법철학 수업을 책으로 옮긴 <정의란 무엇인가>가 출간 넉달이 채 되지 않아 40만부를 넘겼다고 한다. 그 누구도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와 몇달째 딱딱한 인문사회과학 분야 책의 1등을 다투고 있는 이 경이로운 현상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전히 대부분의 사회과학 책이 손익분기점인 2000권을 넘기지 못하고 1쇄를 털지 못하는 상황이다. 마케팅, 하버드의 이름값, 그런 것만으로는 이 현상을 설명하기 어렵다. 같은 저자의 다음 책인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의 판매량은 전작과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정의, 드디어 한국 사회가 전두환 정권의 ‘정의사회 구현’ 이후 스스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 것 아닌가?

마침 현 정권에서 ‘공정한 사회’라는 국정 기조를 제시하였다. 총리 후보자를 비롯해서 장관 후보들이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했고, 김대중 정권의 ‘옷로비 사건’을 연상시키는 ‘유명환 딸 사건’이 생겨났다. 21세기 첫 10년을 경제 근본주의로 “돈이면 최고다” 하며 살아온 우리가 갑자기 철학적 질문 앞에 서 있는 듯하다. 원래 철학적 질문은 시대의 질문이다. 로고스가 처음 철학에 등장해서 소피스트의 궤변론의 시대를 극복한 것은 페르시아가 그리스로 쳐들어왔을 때의 일이다. 이 위기 앞에서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서양 사회에서는 처음으로 절대 진리를 제시한 것 아닌가?

흐름을 본다면 2010년의 한국은 68혁명이 끝나고 복지국가의 틀을 잡아가기 시작하면서 철학적 질문을 쏟아내던 1970년대 초중반의 유럽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도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그런 형태의 사회를 만들면서 비슷한 질문을 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소통’이라는 표현은 하버마스가 1976년에 제시한 개념이다. 그러나 그보다 1년 전, 지금의 <정의란 무엇인가>만큼 독일 사회를 흔든 책이 바로 하버마스의 <정당성의 위기>라는 책이다. 정의, 공정성 같은 개념이 ‘어떻게’에 관해서 질문하는 개념이라면, 정당성은 ‘누가’라는 질문이다. 누가 할 것인가? 경제적 효율성과 성과가 아이엠에프 경제위기 이후의 지난 10년 동안 한국을 지배한 개념이라면, 이제 드디어 우리도 유럽의 70년대와 같이 새로운 질문을 시작하게 된 것인가?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아마도 정당성의 질문이 될 것이다.

행정고시 등 고시의 폐해가 만만치 않지만, 우리는 고시를 폐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 선발과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정당할 것이라는 믿음을 우리가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관이 자기 딸을 특채하는 걸 보면서, 가난해도 유능하고 똑똑한 젊은 친구들을 사무관으로 뽑지 않을 것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한국은 사람을 믿지 않고 컴퓨터를 믿는 나라이다. 그래서 객관식 시험의 폐해를 알면서도 대학입시에 주관식 시험을 전면적으로 도입하지 못한다. 채점만 그런 게 아니다. 아파트 분양도 기준을 정해서 컴퓨터로 순위를 배정해야 하고, 모든 것이 그렇게 되어 있다. 대입에 야심차게 도입한 입학사정관제도 성공하기 어렵다. 우리는 입학사정관이 공평하게 할 것이라는 정당성을 부여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한마디로, 정당성이 위기인 상태로 수십년을 살아온 셈이다. 공정한 사회에서 행위자를 믿을 수 있는 정당성의 시대로 한국이 넘어갈까? 이러한 철학적 질문과 함께, 어쩌면 우리는 선진국이 진짜로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꿈꾸기 시작한 것 같다.

우석훈 2.1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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