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주 언론인
어쩌다가 책 한권을 내게 되었다. 이미 발표한 글들을 모아서 내는 쑥스러움 때문에 가뜩이나 손발이 오그라들 지경인데 책 내고 황당한 일을 여럿 겪었다. 여기저기서 경제적 시간적 물리적 감정적 능력적으로 하기 어려운 무리한 요구를 해와서 거절을 하거나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니까, 공인이면 공인답게 행동하라, 혹은 글과는 많이 다르다는 등 청문회에 나온 인물들에게 하는 것 같은 반응을 보여서 난감했다.
책을 읽지도 않고 인터넷에 어떤 문장이 소개된 것만 보고 이런저런 딴죽을 걸거나 오해에서 비롯된 댓글이 올라와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참을 수 없게 열받았던 것은 내 이름 뒤에 심심치 않게 달린 할매·할마씨·할망구라는 호칭 때문이었다.
60 중반에 이르렀다고 나이를 밝힌 글이 책 속에 있어서인지 할마씨가 제법 감각이 젊다는 둥 세상 보는 눈이 할매로선 그럴싸하다는 둥 하기도 하고 ‘마귀 할망구 년’이라는 표현도 있었다. 공인의 자세를 요구하면서 웬 할망구 하다가 그것을 쓴 사람들을 되짚어 보니 대충 30대에서 4, 50대 같았다. 내가 나이는 많이 먹었지만 그만한 손자를 둘 나이는 아니다.
인터넷을 샅샅이 뒤졌다. 홍세화씨와 얼마 전 심장마비로 세상을 뜬 이윤기씨와는 동갑내기다. 언젠가 주간지에 함께 연재를 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이 쓴 글의 댓글에 할배·할아범이라는 표현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없었다. 더 나이 든 작가들도 찾아보았다. 댓글이나 악플이 많이 달린다는 이문열·황석영 등도 찾아보았다. 모두 없었다. 가장 악플이 많은 나보다 열살은 더 많은 이명박 대통령에게도 쥐와 관련된 온갖 흉한 욕은 다 달려 있지만 할배의 할 자 하나 없었다.
아 그렇구나… 나이 많은 여자가 쓴 글은 일단 제껴두는구나. 그 말에 배어 있는, 할머니 주제에 여자 주제에 제법 아니면 꼴값이라는 여성모욕적이고 비하적인 뉘앙스를 읽으며 많이 피곤해졌다. 힘이 빠졌다. 아주 고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 한 줄 쓰기 위해 밤을 새우고 새벽을 맞은 날들이 떠올랐다.
일주일 전 한겨레에 실린 ‘늙어 보이면 지는 거다’라는 칼럼을 읽고 후배 둘이 개과천선해서 머리부터 염색을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늙어 보이는 것도 진 것인데 늙은 것은 확실히 진 것일 거다. 세상사람들이 진 거라면 진 거다. 그래도 여자와 남자라는 구분 없이 공통적으로 진 것으로 봐주면 받아들일 수 있는데 여자에게만 나이 든 것을 확실하게 되풀이 인식시켜주는 말글살이는 사회적 폭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에 <무한도전>을 보는데 마흔이 넘은, 자신들도 허연 머리를 감추느라 염색을 한 연예인들이 나하고 동갑인 여자에게 할머니 할머니 한다. 자신의 어머니나 누님뻘인 여자에게 웬 할머니? 어머니뻘이면 당연히 아주머니지 웬 할머니인가. 아나운서들도 자기 나이보다 열 살 정도밖에 많지 않은 출연자한테 “할머니분이 나오셨습니다” 한다.
여러가지 힘든 세월을 보냈지만 조선민족의 여자로 태어나 자기 이름을 내걸고 글쓰고 직장생활하고 밥벌어먹고 살고 그나마의 사회적 지위를 얻은 1%에도 지나지 않는 운 좋은 일생을 살아왔다고 위안 삼았는데 할망구 소리에 그렇게 펄펄 뛸 일은 아닌 줄 안다.
그냥 웃어넘길 수도 있는 일이지만 추석 귀향길 귀성길에 길가에서 과일이나 나물을 살 때 이제까지 할머니라고 불렀던 60, 70, 80대에게 아주머니라고 불러보라고 권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쓴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했다. 나물 한 움큼, 과일 하나라도 덤으로 올 것이다. 추석 보너스로 해주는 말이다.
김선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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