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그 많던 언니들은 어디 갔을까 / 김영희

등록 2010-10-20 08:03

김영희 국제뉴스팀장
김영희 국제뉴스팀장
지난 1996년 삼성은 색다른 책을 하나 펴냈다. <여자가 힘든 건가요, 내가 힘든 건가요>는 92년 비서전문직, 93년 여성전문직 공채로 한국 대기업에 실질적으로 대규모 여성 공채 시대를 연 삼성이 당시 근무하던 여성 직원 16명의 이야기를 묶은 책이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삼성의 신입사원 연수원 건물엔 여자화장실이 없을 정도였다.

책 속에서 이들은 여성 동료들이 가정과 일의 문제로 퇴사하는 걸 안타까워하며 ‘끝까지 남겠다’고 다짐했다. 그 16명의 ‘언니들’은 지금 어디 갔을까. 정년퇴직을 한 1명을 제외하면 현재까지 남아 임원에 오른 이는 단 한 명이다. 물론 더 좋은 직장으로 옮긴 경우도 있고 불가피한 사유도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 대기업에서 신입으로 입사한 여성이 같은 직장에서 임원에 오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현재 삼성전자의 여성 임원 8명은 모두 경력으로 채용된 이들이다. 패션 등 몇몇 업종을 제외하면 대기업의 여성 임원은 극소수고, 그나마도 외국계 기업에서 스카우트된 이들이 대부분이다. 4대 그룹의 한 여성 과장은 “회사에 롤모델이 될 만한 여성 선배가 없는 게 가장 답답하다”고 말했다.

지난주 외신 기사 하나를 읽다가 ‘16명 언니들의 오늘’을 추적하겠다고 다짐한 뒤 게으름과 능력부족 탓에 몇년째 책장에 묵혀뒀던 이 책 생각이 났다.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의 조든 시걸 교수 및 매사추세츠대·한신대 교수의 공동조사 결과를 전한 기사는 “외국 기업들은 한국의 성차별주의를 역이용해 이윤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여성 파트너와 일하길 꺼리는 한국의 기업문화 탓에 여성 관리자 기용에 머뭇거리는 다국적기업들을 향해 연구진은 “성차별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여성 인재 기용은 돈을 벌어들일 연금술”이라며 지난 10년간 여성 관리자가 10% 늘었을 때 한국 기업들의 총자산이익률이 1% 늘었다고 강조했다. 교육을 강조하는 유교문화가 여성의 교육수준을 높인 점과 한국 여성들이 집안경제를 주도해 소비자의 요구에 민감한 점 등이 이유로 추정됐다.

분석을 그대로 받아들일지는 차치하고, 연구진이 한국을 첫 대상으로 삼은 이유가 얼굴을 화끈거리게 했다. 시걸 교수는 “여성 고용이 홍보효과로 이용되지 않는 곳을 택해야 했다”고 말한다. 점잖은 표현을 뒤집으면 ‘성평등에 대한 주변 압력이 전혀 없는 사회’라는 얘기다. 세계경제포럼의 2009년 성평등지수 기준으로 한국은 134개국 중 115위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올해 한국의 여성 인력에 관한 기사에서 민간영역에서의 차별이 여성들의 공무원 진출을 늘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쓰고 싶어도 사람이 없다”는 반박의 아우성, 충분히 짐작된다. 하지만 이건 어떤가? 2002년 노르웨이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공기업 이사회에 여성 비율을 40%로 올리는 강제규정을 도입했다. 여성 인력이 풍부해서 그랬을까? 아니다. 노르웨이 역시 90년대까지 여성 이사의 비율은 7%에 미치지 못했다. 40%에 이르려면 200년이 걸린다는 전망까지 나왔다. 물론 규정 덕에 경험 적은 여성들이 특혜를 받는다는 뜻에서 ‘골든 스커트’라는 말까지 나오는 등 진통이 없진 않다. 그래도 노르웨이는 시작했고, 지금은 민간기업에서도 비율이 25%에 이르러 50~65살의 백인 남성이 지배했던 이사회를 뒤바꿔놓고 있다. 스페인, 네덜란드 등도 비슷한 법을 통과시켰다.

최근 티브이 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에서 합창단을 이끈 박칼린 감독에게 열광하는 이들은, 커뮤니케이션으로 구성원을 이끄는 섬세한 여성의 설득 리더십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너무 많은 박칼린을 놓치고 있다.

김영희 국제뉴스팀장dora@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