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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선주 칼럼] 참치를 찾아서…

등록 2011-01-09 18:37수정 2018-05-11 15:09

살 만큼 산 나이지만 새해를 맞으면 이런저런 결심을 하게 된다. 심기일전을 위해서다. 그냥 살던 대로 살지 하는 쑥스러움이 없지는 않지만 한가지 결심을 했다. 소극적인 의미에서나마 채식주의자가 되자는 것이다. 채식주의자에도 종류가 많고 까다로운 조건이 많아 진짜 채식주의자와는 거리가 멀지만, 동물의 뼈를 토막내거나 내장을 이리저리 헤집어서 국 끓이고 찜 만들고 굽고 하는 짓들을 적어도 집에서는 하지 않으려 한다. 참치 때문이다.

고양이 털로 조끼를 만들어 파는 사이트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부르르 떨렸다. 이럴 수가… 호랑이 가죽을 그대로 뒤집어 쓰고 나온 배우를 패셔니스타라고 부러워하는 세상이고, 나도 목 근처에 정체불명의 털이 달린 코트를 입고 다니고는 있다. 그래도 고양이는 안 돼… 그리고… 그리고… 어떤 동물도 안 돼…라는 비명이 절로 나왔다.

참치는 우리집에서 밥을 먹던 고양이 이름이다. 경복궁 옆 서촌에 이사온 뒤 새끼고양이 한 마리가 기웃거리며 쫓아다녔다. 부엌으로 마당으로 대문으로 가는 곳마다 발에 밟혀서 짜증이 났다. 평생 엄마에겐 라면 한 그릇도 안 끓여주던 아들이 내 눈을 피해 참치캔을 사다 주고 닭가슴살과 채소를 데쳐서 주며 길고양이를 집고양이 비슷하게 바꾸어 놓았다. 박수를 두어번 치며 참치라고 부르면 지붕을 쏜살같이 넘어서 마당으로 탁 착지를 하며 온갖 재롱을 다 피웠다. 인간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동물혐오론자이고, 반려동물이라는 말은 인간 위주의 위선이 만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비난했던 나는 너무 성가셔서 쥐약을 놓아서 쫓아버릴까 중얼거렸다. 아들이 엄마 실명을 거론해서 인터넷에 올리겠다고 협박했다.

아침저녁 밥 얻어먹고 토실토실 살이 찐 고양이는 봄이 되자 배가 불러지더니 여름 되어 다섯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아이구 끔찍해라 무서워라 질겁을 했다. 새끼를 낳고 훌쭉해져서 나타난 참치에게 북어와 멸치를 넣고 미역국을 끓여 주었더니 일주일 만에 꺼칠한 털이 매끈해지고 그야말로 꽁지 빠지게 왔다갔다하며 새끼들을 먹이고 거두었다.

가을이 되어 새끼들이 제법 컸다. 이것들이 다섯 마리씩 새끼를 낳으면 한 마리가 1년도 안 되어 스물다섯 마리로? 아이고 무서워라 싶어 구청에 연락을 했다. 친절하게도 무료로 새끼들을 잡아가고 며칠 후에 원 상태로 돌려놓겠다고 했다. 그날 참치는 자식들을 잡아가는 상황에 놀랐는지 사라졌다. 노란 새끼 한 마리도 같이 사라졌다. 며칠 있다 돌아오겠거니 했지만 새끼들은 중성화 표시로 귀 한 귀퉁이를 잘려서 왔지만 참치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새끼들은 참치보다 더 커졌고 ‘서촌고양이’라고 치면 인터넷에 주르륵 뜨는 골목의 명물이 되었지만 참치는 나타나지 않았다.

연초에 텔레비전에서 농산물이 수확 단계에서 절반이 버려지고 유통 단계에서 또 절반이 쓰레기가 되고 각 가정에서 또 절반이 쓰레기통으로 향하고 빵집에서는 그날 팔지 못한 빵이 바로 쓰레기 분쇄기로 들어가는 광경이 방영되었다. 생산과 유통, 소비, 쓰레기 처리 과정에서 드러난 엄청난 에너지와 빵 한 조각이 없어서 굶어죽는 아이들의 비참함과 함께. 내친김에 덜 먹자, 덜 버리자, 덜 남기자, 못생긴 오이, 못생긴 감자도 사서 먹자고 결심한다. 먹어야만 사는 생명, 먹이 때문에 사라지고 버려지는 모든 생명에 대한 가책 때문에.

모든 생명 있는 것과의 인연은 무한책임이다. 그래서 사람이든 동물이든 생로병사를 겪는 것들과의 인연 맺기를 두려워했는데… 어쩌다 나에게 온 생명인 참치… 거두어 달라고 거두어 달라고 말간 눈으로 쫓아다닌 참치의 눈을 생각한다. 엄동설한에 어디 가서 뭐를 먹고 지내는지 어느 쓰레기통 어느 차 밑에서 불쑥 튀어나올 것 같아서 골목길을 누빈다.

세상의 어떤 감정보다 진하고 깊고 돌이킬 수 없는 감정은 뜨거운 사랑도 격렬한 분노도 아닌 모든 생명 있는 것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향한 연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 참치야 어디 있니… 너는 나를 기억하니… 너는 내가 보고 싶지 않니… 오늘 새벽에도 골목길을 돌며 참치를 부른다.

김선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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