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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내가 가장 나종 지니인 집 / 김민정

등록 2011-01-26 19:26

김민정
시인
김민정 시인
두 달 뒤면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이사를 해야 한다. 계약서에 사인한 대로 꼬박 2년을 채운 것이 지난 연말이었으나 집을 보러 오는 이도 없고 자고로 이사라 하면 꽃 피는 봄이 좋지 않겠는가, 주인아줌마와 합의하에 미루고 보니 이 지경이다. 그렇다. 하필 전세 대란이란 얘기다. 늘 그렇듯이 대책은 없고 우려만 있는 뉴스, 지겨워 짜증나 하면서도 틀어놓고 있노라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나는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부모님 집을 나와 혼자 산 지 올해로 8년째, 그사이 도합 다섯 번의 이사를 했다. 잦은가, 무난한가, 적은가, 이사의 횟수를 두고 뭐라 가늠할 수 없는 것은 집 없는 자들의 설움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일 거다. 어떤 이는 빚을 낼망정 이사를 참았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빚을 낼 수 없어 이사를 택했을 것이니.

첫 집은 왕십리 근처의 오피스텔이었다. 쓰러질 듯 무너져 가는 재개발 지역에 저 혼자 잘났다고 우뚝 솟아 있는 17층 건물에서 나는 채 1년을 못 살았다. 밤이면 슬픈 얼굴을 한 남자 귀신이 외롭다며, 놀아달라며 내 방 창문에 매달렸다. 가위눌림을 수없이 반복하다 풍수지리 운운하며 터 좋기로 소문난 광화문의 한 오피스텔로 두 번째 이사를 했다. 대학 시절 난생처음 한 장군의 동상을 올려다보며 강감찬이다, 했던 촌스러운 내가 어느새 이순신 동상을 배경으로 중국인 관광객들에게 잘난 척 사진을 찍어줄 즈음 또다시 나는 짐을 꾸리고 있었다. 전세에서 월세로, 매달 아들의 학원비로 쓸 현금이 필요하다며 당당하게 나가라니 말이다. 그 후로 남산, 마포, 일산까지 직장을 따라 세 번의 이사를 더 반복했다. 산이 좋아, 홍대가 좋아, 시골이 좋아, 까다로운 입맛대로 옮기다 보니 내 나이 여성들의 비밀병기라 할 수 있는 변변한 적금통장 하나 마련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엄마는 볼 때마다 한심하다며 내 등짝을 때리지만 어쩌겠는가, 나도 다 잘 살아보겠다고 이 짓이었는걸.

설 명절을 앞두고 포장이사 사장님의 선물이 도착했다. 커다란 박스가 민망할 정도로 가벼운 무게감이 익숙한 걸 보니 예년처럼 두루마리 휴지다. 이사 업계의 우수고객이 된 것을 뿌듯하게 생각해야 하나 고마움과 씁쓸함을 고루 안고 집으로 향하는데 아파트 입구에 웬 사다리차다. 이삿짐을 싣고 나르는 모양새야 한두 번 본 것이 아니나 눈이 수북하게 쌓인 토요일이었고, 게다가 저녁 7시가 넘은 밤이었다. 엘리베이터는 11층에서 내려올 줄 몰랐다. 그때 어디선가 한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너 때문이라느니, 억울하다느니, 불쌍한 애들은 이제 어쩔 셈이냐며 누군가와 통화하며 흐느끼는데 말끝에 이렇게 반복적으로 추임새를 넣고 있었다. 내 집, 내 집, 내 집 내놓으라고!

박완서 선생님의 부음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묘하게도 선생님의 얼굴이 아니라 선생님의 소설이 아니라 선생님의 집이었다. 볕이 좋은 어느 날 창가 옆 소파에 소녀처럼 얌전히 앉아 계시던 선생님이 마당을 내다보며 나무며 계절이며 영화며 여행이며 책을 이야기하시는데 나는 연신 선생님처럼 되고 싶다, 가 아니라 이 집에서 살고 싶다, 라고 발음했던 것 같다. 참으로 안도가 되는 평화 속에 한 몸처럼 한 덩어리로 한 풍경을 이루던 사람과 집. 바쁠 필요도 없고 시끄러울 필요도 없고 느리면 느린 대로 고요하면 고요한 대로 흘러가는 삶의 어떤 숨 같은 거. 우리가 바라는 집이란 결국 이러한 여유 아닐까.

선생님은 꽁꽁 언 땅을 열고 누구도 열어볼 수 없는 당신만의 비밀스러운 집을 찾으셨다. 누군들 가장 나종 지니인 집이 그러지 아니할까.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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