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글 쓰는 사람으로 현실과 싸우고, 기득권에 편입되지 않으려고 노력해온 언론인 김선주씨. 그는 “언론인은 영원한 비판자여야 한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조선일보와 한겨레 거친 언론인 김선주
그가 들려주는 인생과 글쓰기 이야기
그가 들려주는 인생과 글쓰기 이야기
제37화 5년 뒤 직설을 당겨서 하다
함 하시죠?… 뭘 해?… 직설… 그걸 내가 왜?… 보고 싶어 하는 독자들이 많아요… 으,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아… 그럼 차라도 한잔… 차야 마실 수 있지만… 사진도 한판 박으시고… 얼굴이나 보자… 오셔서 그냥 설렁설렁 이야기나 나누시죠… (그렇게 하여 역사는 이루어졌는데)… 그냥 써도 되겠는걸요… 지면에 내보내긴 싫어… 책 냈을 때도 인터뷰가 빵개였다면서요… 쪽팔려, 속이 메슥거려… 인터넷 서점과 인터뷰하고도 끝내 못 나가게 막으셨다면서요?… 내가 겁 많고 소심증이잖아, 책도 괜히 냈어, 괜히 냈어… 정리해 보니 내용도 쓸만한걸요… 이거 나오면 이민 갈 거야… 진지한 분위기로 많이 손봤습니다… 아니 내가 왜 직설에 나와야 해? 이슈도 없잖아… 궁금하잖아요… 뭐가?… 좀 더 알고 싶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네… 칼럼과 책으로는 2% 부족한 무엇, 독자들이 그걸 알고 싶어 한다니깐요… 안 돼, 우리 그냥 5년 뒤에 하자… 5년 당겨 미리 하신다 생각하시죠… 정말 곤란하다… 강을 건너고 말았습니다… (체념끝에) 사진이라도 제발 코딱지만하게 넣어줘….(이상 섭외 과정을 기자 입맛에 맞게 과장하고 각색한 내용이었습니다)
1947년, 서울 출생. 70년 조선일보 입사, 75년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참여해 강제해직. 88년 한겨레 창간멤버로 입사, 2004년 논설주간. 2011년 현재도 인기 칼럼니스트로 독자의 사랑을 받는 영원한 현역 언론인. 저서에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2010). 그 이름 김선주.
진행·정리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서해성(이하 서) ‘우리 시대 큰누님’을 모셨습니다. 김선주(이하 김) 징그럽게시리. ‘우리 시대 아이돌 연인’처럼 좋은 거 다 놔두고.(웃음)
한홍구(이하 한) 6개월 섭외 끝에. 서 분단 뒤 태어났는데도 인간 김선주에겐 가보지 않은 만주가 들어 있어요. ‘우리 시대 마지막 대륙형 인간’. 드넓은 벌판 앞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장국을 끓이고 있는. 김 ‘대륙형 인간’은 구시대적 인물이란 말 아닌가? 조선일보 여기자 중 왜 혼자만 잘렸을까? 서 인간 김선주가 가장 잘 쓰는 말이 ‘쪽팔려’잖아요. 쪽팔린다는 게 뭐죠? 김 내가 원래 소심하고 겁쟁이예요. 글을 쓰는 것으로 많이 넘어섰다고 보지만. 친구들이 내 책(<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을 보고서는 “너 참 이중적이다”라고 하지. 말이 많으면 오류와 잘못도 많아지고. 직설이야말로 대표적 쪽팔림이지. 한 언론인 김선주야말로 직설이잖아요. 문제를 에둘러가지 않는. 김 글을 쓸 때는 실은 한땀 한땀 장인정신으로, 좌고우면해가면서….(웃음) 앨런 긴즈버그의 시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있어요. 너무 많은 폭력, 너무 많은 부, 너무 많은 가난, 너무 많은 철학, 너무 많은 헛소리…. 마지막이 ‘그러나 너무 부족한 침묵’이야. 오늘 아침 그 시를 다시 읽으면서…그래 침묵을 지켜야겠다.(웃음). 직설 하지 말자.(웃음) 서 철저히 구어체 글을 써오시는데, 유명짜한 남 말을 가져오는 법도 없고. 김 가방끈이 짧아서. 문어체를 모르니까. 독자를 위해서. 내 눈으로 본, 내가 잘 아는 주변이야기에서 출발해야 공감을 얻을 수 있으니까. 먼저 옳다 그르다를 정하고 당위로 쓴 것은 나중에 보면 생경하고 지워버리고 싶어지고. 서 자기 안에 끝없이 생채기를 내며 쓴다는 느낌. 글 많이 고치시죠? 김 말도 못하게. 쓸 때마다 머리를 벽에 찧으니까. 온 집안이 비상사태가 돼. 글 쓸 때는 밥도 안 해준다구. 한 서울 정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서울 토박이신데. 김 우리 집에 식객들이 많았어요. 북에서 온 친척, 남에서 온 친척들이 서울로 와서 마당에 텐트 치고 지낸 적도 있고. 전쟁 뒤라 졸지에 거지가 된 가족들이 골목에 넘쳤고. 밥과 김치만 먹고 산 것 같아 그게 불만이었는데, 아이고, 그 밥과 김치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몇십년이 지났는데 밥과 김치 못 먹고 저세상 간 영화감독(최고은), 아이고 가슴이 뻐근해서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어지더라고. 가엾어라, 미안해라. 한 주변에 글쟁이·신문쟁이들이 많았다면서요. 책을 끼고 살았고. 김 <사상계> <현대문학> <세계문학>, 한국문학전집, <타임> <뉴스위크> <파리마치> <라이프> <주부의 우> <영화의 우> 등 외국 잡지도 널렸었지. 글자중독이었어요. 공부는 뒷전이었고. 서 사람과 책을 한 그릇에 섞어서 읽으셨겠네요. 김 엄마나 이모가 신여성이셨는데 살아계시면 올해 엄마가 꼭 100살이시네. 이분들과 친구분들이 이광수 나혜석 모윤숙 노천명 최린 최승희 김순임 등 등 역사상 인물들과 모두 얽히고설킨 분들이라. 전쟁 때 과부 된 사람, 남편이 북으로 간 사람, 북쪽에서 살다가 목숨을 걸고 내려온 사람, 그러다가 길에서 자식을 잃어버린 사람, 뭐 숱한 사정들도 다 주워들었지. 어렸을 때부터 이런 사람들과 나는 같은 시대를 산 것 같아. 어떤 때는 내가 100살 같다니까. 한 <조선일보>에서 해직당할 때 왜 여자들 중 혼자만 잘렸는지. 김 여기자가 나밖에 없었어. 메롱.(웃음) 그때 조선일보는 자고로 여기자 하나 결혼하면 그만두게 하고 다시 여기자를 뽑았어요. 서 한명씩만 뽑는 데 들어갔다면 굉장한 실력 아닌가요? 김 실력은 무슨. 김아무개 여기자가 결혼하면서 그만둔다는 소문을 우연히 들은 거야. 내가 대학생활에 등한했는데도 은사였던 이어령 선생님이 최석채 주간과 선우휘 편집국장한테 추천을 해주셨지. 편집국장을 처음 찾아갔을 땐 자리에 안 계시더라고. 그래서 스커트에 하이힐 신고 눈 화장까지 한 차림으로 다리 꼬고 앉아 있었더니 술값 받으러 온 ‘새끼마담’인 줄 알았다고 나중에 기자들이 전해주더군.(웃음) “내가 원했던 롤모델을 내가 하자” 서 기자 생활 할 때의 에피소드도 소개를 좀. 김 초년병 시절엔 누구나 무용담 한두개는 있지만 그런 걸 뭘. 데스크가 말도 안 되는 기사 쓰랄 때, 절대 안 했지. 돌이켜보면 조금 이해해줘도 될 거였는데.(웃음) 살아오면서 하고 싶은 일, 쓰고 싶은 글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하기 싫은 일, 쓰기 싫은 기사를 쓴 적은 없어. 한 방우영 사장이 한명밖에 없는 여기자라고 각별히 대했겠어요. 김 선자리 여러번 만들어주었지. 그때마다 결혼해도 신문사 다닐 거라고. 사장님 고소할 거라고 엄포를 놓았지.(웃음) 서 조선투위 데모할 때 간부들이 말렸나요? 김 별로. 처음부터 찍혔으니까. 작고하신 이규태 선생이 안타까워했지요. 내가 워낙 집단으로 모이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농성이나 데모는 안 했고. 그때도 나는 그 모든 것의 주변부였을 뿐이고 주역은 아니었어요. 박수 치고 잘한다고 부추기기는 했지. 한 월급은 얼마쯤이었는지? 송건호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3년차 은행대리랑 비슷했어요. 김 동아일보보다 적었는데. 보름에 한번씩 6천원씩 줬어. 신문사 기자들이 월급 제대로 받은 건 전두환 덕이야. 1970년대엔 월급 엄청 짰어. 야근하고 집에 갔다 버스 타고 오면 돈 드니까 회사에서 자는 기자들이 숱했어.(웃음) 잘나가는 좋다는 부처 기자들은 요정과 룸살롱을 들락거리고. 촌지가 월급의 열배라는 이야기도 돌았으니까. 서 13년에 걸친 해직살이는? 김 같이 해직된 남자하고 연애했지.(웃음) 결혼하고 애 낳았어. 그리고 밤마다 시퍼렇게 칼을 갈며 살았지.(웃음) 한 다시 기자로 돌아온다고 생각했는지요? 김 전혀! 한겨레 들어갈 때도 남편한테 들어오라 했어. 남편은 사업하니까 내가 들어간다고 했지. 창간 주도하던 아무개씨가 기절을 했어.(웃음) 서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독후감을 읽어보니 김선주를 롤모델로 삼고 싶다고들 했더군요. 정작 본인은 롤모델이 있는지요. 김 해직되고 집에 있을 때 후회를 많이 했어요. 기자생활을 좀더 진지하게 할걸, 또 이런저런 기자 선배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한겨레 들어오면서는 정말 환골탈태했지요. “내가 원했던 롤모델을 내가 하자”고 정말 뼛속 깊이 결심했어요. “아, 내가 이렇게 했을 때 후배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행동의 기준으로 삼았어요. 한 조선일보 다닐 때 존경했던 선배는? 김 최현우씨라고 조선일보의 명사회부장. 일찍 세상을 떴지. 그때 기자들이 외국여행을 다녀오면 워낙 기회가 많지 않아서 해구신·뱀술 등 상납용과 위부터 아래까지 고루고루 선물을 사왔지요. 그 양반은 조니워커 딱 한 병 사들고 들어왔다는 전설을 남겼는데 인상적이었지. 그렇게 표표한 모습이 멋있더라고. 폼생폼사.(웃음) 서 롤모델 있는 사람은 자기가 롤모델이 못 된다고들 하죠. 김 한겨레 들어간 뒤 남편이 아침 출근할 때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잔소리를 했어요. “마누라 노릇 못하는 건 참아줘도 기자·선배 노릇 제대로 못하는 건 참을 수 없다”고.(웃음) 도움 많이 받은 셈이지. 서 어떤 롤모델이고자 했는지? 김 나 자신한테는 엄격하고 남한테는 너그럽기를 바랬는데, 희망사항이었고. 그쪽을 향해 매일매일 나아가려 한 것은 진심. 서 인간에 대한 오지랖이 남달리 큽니다. 소설가 황석영이 99년 옥에서 나와 어려움을 겪을 때 신문사 차원에서 통 크게 손을 쓴 일이나, 백기완 임재경 리영희 같은 선배들을 살뜰하게 챙기셨죠. 김 와전! 밥 한두번 산 것 가지고…. 황석영씨가 7년 감방생활을 하고 나와 오피스텔에서 산다고 해요. 방이 작아서 감방에서 감방으로 옮긴 것 같다고 하는데 가슴이 미어지더라구. 당시 권근술 사장한테 석영씨 일산에 아파트 하나 얻어주자 했더니 “좋다”는 말 끝에 “첫 작품은 한겨레와 계약하자” 그래서 “부담 주지 맙시다” 했어요. 황석영씨 얼마 안 있어 돈 갚았고. 난 한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분들을 우리 사회가 조금은 챙기고 잊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내가 그 시대와 같이 한 보람도 있고. 노무현을 너무 외롭게 하지 맙시다 서 그 오지랖도 롤모델에 포함되는지? 김 일종의 보험. 내가 나이들었을 때 후배들이 밥도 살 거 아냐.(웃음) 서 노무현 대통령이 ‘좋아하는 언론인이 김선주’라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죠. 김 그것 때문에 피봤지. 공개적으로 그렇게 말하면 내가 불편해지잖아. 당선자 시절 신문사 방문했을 때 단 5분 만났을 뿐인데. 첫 조각을 할 때 청와대에서 직접 전화를 했어요. “노무현입니다”라고. 한 지난해 6월 ‘직설’ 사태에 대해 칼럼을 써서 함께 일을 겪은 셈인데, 노무현 지지자들이 맹공을 퍼붓기도 하고. 김 노무현을 사유화하지 말자는 이야기였지요. 내가 조직과 집단을 싫어하는데, 조직의 논리가 승하다 보면 배타적으로 되는 것을 역사적으로 많이 봐왔어요. 쭉정이는 빼버리고 박수부대도 빼버리고 옆에서 반신반의하며 좋아할까 말까 망설이는 층도 빼버리고 알곡들만 모인다면, 노무현을 너무 외롭게 하는 게 아닌가 싶고. 촘촘하고 빡빡한 그물이 아니라 넓고 엉성한 그물로서 다 가지고 가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거든. 근데 다음 선거가 핫해지려면 누가 나와야 되는지 알아? 김문수하고 유시민이 붙으면 왔다야.(웃음) 둘 다 인상이 별로잖아. 그놈의 이미지선거에서 벗어나려면. 우리 사회가 한발 앞으로 나가려면 한번쯤은 그렇게 화끈하게. 서 박근혜 대세론은? 김 그 방면에 정통한 사회심리학자가 그러는데 박근혜는 한나라당 후보가 되는 순간 그 가치가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하더라구. 박근혜는 공주이고 공주는 액자 속에 있어야지.(웃음) 저잣거리에 나오면, 적나라하게 주름도 잡티도 다 보이게 된다구. 다음 선거는 한나라당만 아니면 개똥이가 나오든 쇠똥이가 나오든 상관없지 않나? 지난번엔 정동영을 뜨악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유권자들이 주춤주춤하고 있는 사이에 최악의 선택을 해버린 거고 우리는 화성 말 하는 것 같은 대통령을 갖게 된 것이고. 한 지금 조선일보를 돌아보는 소감은? 김 김영삼 대통령 시절부터 줄곧 복직 이야기가 나왔는데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가 그랬어요. 조선일보 복직돼서 사설 한 편 쓰고 그 다음날 자기 발로 걸어나오는 게 소원이라고. “지금까지의 조선일보 사설은 다 무효다!”라고.(웃음) 한 조선일보에 남은 사람들과 이런저런 정이 있을 텐데. 김 이쁜 사람은 다 나왔어.(웃음) 정태기 신홍범 성한표 등 알짜들만 나왔지. 3분의 1이 나왔으니까. 본질적으로 나왔느냐와 안 나왔느냐가 자질을 가르는 잣대는 아니었다고 봐요. 그 시점에선 사람마다 개인사와 얽힌 일이 있고 목구멍이 포도청인 문제도 있고. 단지 처음의 자유언론운동을 했을 때의 그 정신은 기자들 모두의 당연한 것이었는데 그 마음을 남아 있던 사람들이 잊고 간단하게 버렸다는 것이 가슴 아프지. 한 기자들은 언론인으로 살아야 하나요, 직업인으로 살아야 하나요? 김 난 옛날 사람이라서 밥벌이보다 언론의 사명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 적은 월급 가지고 좀 어렵게 살자 싶은 마음이 크지. 오래 고민했는데 최소한 직장으로서 한 가정의 가장의 역할에 대한 뒷받침을 못하면서 사명감을 가지라고 하는 게 어려운 일 같아. 서 김선주에게 글이란? 김 고정관념을 깨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건 그렇지 않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꼭 그게 그런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은가”라는 의문이 없으면 쓸 필요가 없다고 봐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박수만 치려면 글을 쓸 필요가 없잖아. “글이란 일종의 반동이고 불온이고 안티”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서 서울토박이로서 소위 명문 학교를 주르륵 다니셨으니까 우리 사회의 주류라고도 볼 수 있는데, 실제로는 주류인 적이 없으세요. 공직 역시 한번도 안 맡으셨죠? 김 명문은 무슨…. 내가 공직을 할 캐릭터가 아니잖아. 교통신호도 잘 안 지키고 비리가 많다고요. 무엇보다 지금 내가 하던 일보다 잘할 수 없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거기 가서 죽을 쑤겠어?(웃음) 공직 노! 부르면 조르르 달려가는 게 싫어 서 노무현 정부 아래서 이거저거 제안 받으신 걸로 아는데. 김 노코멘트. 실은 언론인의 자존심이랄까 허영심 때문이었고, 부르면 조르르 달려가거나 삼고초려한다고 감읍해서들 가는 게 싫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관이 없는 제왕이라는 ‘무관의 제왕’이라는 게 참 폼난다 싶었어. 사람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고. 언론인은 영원한 비판자여야 하니까. 그러려고. 서 한겨레 퇴직(2004년 12월) 뒤에도 글 쓰는 사람으로 현실과 싸우고, 기득권에 편입되지 않으려는 자세를 후배들이 따르려고 합니다. 롤모델. 김 언론인으로서는 절대로 헛발질 안 하겠다는 것이 나와 내 직업에 대한 최소한도의 예의지. 그것만은 내 인생에서 지키자 했어요. 그렇게 안 하면 내 젊은 날이 허무해지고, 내가 가졌던 분노와 정의로움에 대한 끝없는 목마름 같은 것도 허사가 되니까. 한 앞으로 쓰고 싶은 글은? 김 나한테도 있고 너한테도 있는 파시즘에 관해 쓰고 싶어요. 무의식적으로 우리 몸과 마음속에 체질화된, 한번도 깨지 못한 틀들에 대해. 우리 사회가 너무 억압이 많아서 개인적인 사고를 두려워하고, 안전하게 집단 뒤에 숨으려 하고. 어느 시점부터 우리 사회에 괴짜가 없어졌어요. 튀는 사람은 모두 한 보자기에 싸려고 하고. 서 그래서 오늘 대륙형 인간을 모신 겁니다. 김 대륙형 인간, 그 반대말이 뭔데? 한 털 빠지면 도로 그 구멍을 찾아 집어넣는. 서 섬형 인간이죠. 폐쇄적 범생이 부류들이 과두제 사회인 한국의 권력을 점하고 있는 엘리트들이죠. 김 나도 본질적으로 폐쇄적인 범생이겠지. 평생 붙박이별이었으니까. 떠돌이별은 붙박이별을 부러워하고 붙박이별은 떠돌이별을 부러워하듯이. 내가 이렇게 살았으니까 너도 그렇게 살라고 끝없이 자기복제를 강요하는데, 나 자신도 그러한 사회적 억압이나 내 안의 파시즘과 항상 갈등하고 있어요. 서 대륙형 인간은 소심하다! 대륙형에 섬세함이 깃들어야 온기가 있죠. 김 오늘 아침에도 여기 오면서 “직설은 5년 뒤에 하겠다”고 말하려 했는데. 너무 많은 헛소리, 너무나 적은 침묵을 했어. 이런 걸로 직설을 하다니 내가 데스크면 절대 용납 안 하는데.(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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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성(이하 서) ‘우리 시대 큰누님’을 모셨습니다. 김선주(이하 김) 징그럽게시리. ‘우리 시대 아이돌 연인’처럼 좋은 거 다 놔두고.(웃음)
한홍구(이하 한) 6개월 섭외 끝에. 서 분단 뒤 태어났는데도 인간 김선주에겐 가보지 않은 만주가 들어 있어요. ‘우리 시대 마지막 대륙형 인간’. 드넓은 벌판 앞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장국을 끓이고 있는. 김 ‘대륙형 인간’은 구시대적 인물이란 말 아닌가? 조선일보 여기자 중 왜 혼자만 잘렸을까? 서 인간 김선주가 가장 잘 쓰는 말이 ‘쪽팔려’잖아요. 쪽팔린다는 게 뭐죠? 김 내가 원래 소심하고 겁쟁이예요. 글을 쓰는 것으로 많이 넘어섰다고 보지만. 친구들이 내 책(<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을 보고서는 “너 참 이중적이다”라고 하지. 말이 많으면 오류와 잘못도 많아지고. 직설이야말로 대표적 쪽팔림이지. 한 언론인 김선주야말로 직설이잖아요. 문제를 에둘러가지 않는. 김 글을 쓸 때는 실은 한땀 한땀 장인정신으로, 좌고우면해가면서….(웃음) 앨런 긴즈버그의 시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있어요. 너무 많은 폭력, 너무 많은 부, 너무 많은 가난, 너무 많은 철학, 너무 많은 헛소리…. 마지막이 ‘그러나 너무 부족한 침묵’이야. 오늘 아침 그 시를 다시 읽으면서…그래 침묵을 지켜야겠다.(웃음). 직설 하지 말자.(웃음) 서 철저히 구어체 글을 써오시는데, 유명짜한 남 말을 가져오는 법도 없고. 김 가방끈이 짧아서. 문어체를 모르니까. 독자를 위해서. 내 눈으로 본, 내가 잘 아는 주변이야기에서 출발해야 공감을 얻을 수 있으니까. 먼저 옳다 그르다를 정하고 당위로 쓴 것은 나중에 보면 생경하고 지워버리고 싶어지고. 서 자기 안에 끝없이 생채기를 내며 쓴다는 느낌. 글 많이 고치시죠? 김 말도 못하게. 쓸 때마다 머리를 벽에 찧으니까. 온 집안이 비상사태가 돼. 글 쓸 때는 밥도 안 해준다구. 한 서울 정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서울 토박이신데. 김 우리 집에 식객들이 많았어요. 북에서 온 친척, 남에서 온 친척들이 서울로 와서 마당에 텐트 치고 지낸 적도 있고. 전쟁 뒤라 졸지에 거지가 된 가족들이 골목에 넘쳤고. 밥과 김치만 먹고 산 것 같아 그게 불만이었는데, 아이고, 그 밥과 김치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몇십년이 지났는데 밥과 김치 못 먹고 저세상 간 영화감독(최고은), 아이고 가슴이 뻐근해서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어지더라고. 가엾어라, 미안해라. 한 주변에 글쟁이·신문쟁이들이 많았다면서요. 책을 끼고 살았고. 김 <사상계> <현대문학> <세계문학>, 한국문학전집, <타임> <뉴스위크> <파리마치> <라이프> <주부의 우> <영화의 우> 등 외국 잡지도 널렸었지. 글자중독이었어요. 공부는 뒷전이었고. 서 사람과 책을 한 그릇에 섞어서 읽으셨겠네요. 김 엄마나 이모가 신여성이셨는데 살아계시면 올해 엄마가 꼭 100살이시네. 이분들과 친구분들이 이광수 나혜석 모윤숙 노천명 최린 최승희 김순임 등 등 역사상 인물들과 모두 얽히고설킨 분들이라. 전쟁 때 과부 된 사람, 남편이 북으로 간 사람, 북쪽에서 살다가 목숨을 걸고 내려온 사람, 그러다가 길에서 자식을 잃어버린 사람, 뭐 숱한 사정들도 다 주워들었지. 어렸을 때부터 이런 사람들과 나는 같은 시대를 산 것 같아. 어떤 때는 내가 100살 같다니까. 한 <조선일보>에서 해직당할 때 왜 여자들 중 혼자만 잘렸는지. 김 여기자가 나밖에 없었어. 메롱.(웃음) 그때 조선일보는 자고로 여기자 하나 결혼하면 그만두게 하고 다시 여기자를 뽑았어요. 서 한명씩만 뽑는 데 들어갔다면 굉장한 실력 아닌가요? 김 실력은 무슨. 김아무개 여기자가 결혼하면서 그만둔다는 소문을 우연히 들은 거야. 내가 대학생활에 등한했는데도 은사였던 이어령 선생님이 최석채 주간과 선우휘 편집국장한테 추천을 해주셨지. 편집국장을 처음 찾아갔을 땐 자리에 안 계시더라고. 그래서 스커트에 하이힐 신고 눈 화장까지 한 차림으로 다리 꼬고 앉아 있었더니 술값 받으러 온 ‘새끼마담’인 줄 알았다고 나중에 기자들이 전해주더군.(웃음) “내가 원했던 롤모델을 내가 하자” 서 기자 생활 할 때의 에피소드도 소개를 좀. 김 초년병 시절엔 누구나 무용담 한두개는 있지만 그런 걸 뭘. 데스크가 말도 안 되는 기사 쓰랄 때, 절대 안 했지. 돌이켜보면 조금 이해해줘도 될 거였는데.(웃음) 살아오면서 하고 싶은 일, 쓰고 싶은 글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하기 싫은 일, 쓰기 싫은 기사를 쓴 적은 없어. 한 방우영 사장이 한명밖에 없는 여기자라고 각별히 대했겠어요. 김 선자리 여러번 만들어주었지. 그때마다 결혼해도 신문사 다닐 거라고. 사장님 고소할 거라고 엄포를 놓았지.(웃음) 서 조선투위 데모할 때 간부들이 말렸나요? 김 별로. 처음부터 찍혔으니까. 작고하신 이규태 선생이 안타까워했지요. 내가 워낙 집단으로 모이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농성이나 데모는 안 했고. 그때도 나는 그 모든 것의 주변부였을 뿐이고 주역은 아니었어요. 박수 치고 잘한다고 부추기기는 했지. 한 월급은 얼마쯤이었는지? 송건호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3년차 은행대리랑 비슷했어요. 김 동아일보보다 적었는데. 보름에 한번씩 6천원씩 줬어. 신문사 기자들이 월급 제대로 받은 건 전두환 덕이야. 1970년대엔 월급 엄청 짰어. 야근하고 집에 갔다 버스 타고 오면 돈 드니까 회사에서 자는 기자들이 숱했어.(웃음) 잘나가는 좋다는 부처 기자들은 요정과 룸살롱을 들락거리고. 촌지가 월급의 열배라는 이야기도 돌았으니까. 서 13년에 걸친 해직살이는? 김 같이 해직된 남자하고 연애했지.(웃음) 결혼하고 애 낳았어. 그리고 밤마다 시퍼렇게 칼을 갈며 살았지.(웃음) 한 다시 기자로 돌아온다고 생각했는지요? 김 전혀! 한겨레 들어갈 때도 남편한테 들어오라 했어. 남편은 사업하니까 내가 들어간다고 했지. 창간 주도하던 아무개씨가 기절을 했어.(웃음) 서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독후감을 읽어보니 김선주를 롤모델로 삼고 싶다고들 했더군요. 정작 본인은 롤모델이 있는지요. 김 해직되고 집에 있을 때 후회를 많이 했어요. 기자생활을 좀더 진지하게 할걸, 또 이런저런 기자 선배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한겨레 들어오면서는 정말 환골탈태했지요. “내가 원했던 롤모델을 내가 하자”고 정말 뼛속 깊이 결심했어요. “아, 내가 이렇게 했을 때 후배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행동의 기준으로 삼았어요. 한 조선일보 다닐 때 존경했던 선배는? 김 최현우씨라고 조선일보의 명사회부장. 일찍 세상을 떴지. 그때 기자들이 외국여행을 다녀오면 워낙 기회가 많지 않아서 해구신·뱀술 등 상납용과 위부터 아래까지 고루고루 선물을 사왔지요. 그 양반은 조니워커 딱 한 병 사들고 들어왔다는 전설을 남겼는데 인상적이었지. 그렇게 표표한 모습이 멋있더라고. 폼생폼사.(웃음) 서 롤모델 있는 사람은 자기가 롤모델이 못 된다고들 하죠. 김 한겨레 들어간 뒤 남편이 아침 출근할 때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잔소리를 했어요. “마누라 노릇 못하는 건 참아줘도 기자·선배 노릇 제대로 못하는 건 참을 수 없다”고.(웃음) 도움 많이 받은 셈이지. 서 어떤 롤모델이고자 했는지? 김 나 자신한테는 엄격하고 남한테는 너그럽기를 바랬는데, 희망사항이었고. 그쪽을 향해 매일매일 나아가려 한 것은 진심. 서 인간에 대한 오지랖이 남달리 큽니다. 소설가 황석영이 99년 옥에서 나와 어려움을 겪을 때 신문사 차원에서 통 크게 손을 쓴 일이나, 백기완 임재경 리영희 같은 선배들을 살뜰하게 챙기셨죠. 김 와전! 밥 한두번 산 것 가지고…. 황석영씨가 7년 감방생활을 하고 나와 오피스텔에서 산다고 해요. 방이 작아서 감방에서 감방으로 옮긴 것 같다고 하는데 가슴이 미어지더라구. 당시 권근술 사장한테 석영씨 일산에 아파트 하나 얻어주자 했더니 “좋다”는 말 끝에 “첫 작품은 한겨레와 계약하자” 그래서 “부담 주지 맙시다” 했어요. 황석영씨 얼마 안 있어 돈 갚았고. 난 한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분들을 우리 사회가 조금은 챙기고 잊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내가 그 시대와 같이 한 보람도 있고. 노무현을 너무 외롭게 하지 맙시다 서 그 오지랖도 롤모델에 포함되는지? 김 일종의 보험. 내가 나이들었을 때 후배들이 밥도 살 거 아냐.(웃음) 서 노무현 대통령이 ‘좋아하는 언론인이 김선주’라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죠. 김 그것 때문에 피봤지. 공개적으로 그렇게 말하면 내가 불편해지잖아. 당선자 시절 신문사 방문했을 때 단 5분 만났을 뿐인데. 첫 조각을 할 때 청와대에서 직접 전화를 했어요. “노무현입니다”라고. 한 지난해 6월 ‘직설’ 사태에 대해 칼럼을 써서 함께 일을 겪은 셈인데, 노무현 지지자들이 맹공을 퍼붓기도 하고. 김 노무현을 사유화하지 말자는 이야기였지요. 내가 조직과 집단을 싫어하는데, 조직의 논리가 승하다 보면 배타적으로 되는 것을 역사적으로 많이 봐왔어요. 쭉정이는 빼버리고 박수부대도 빼버리고 옆에서 반신반의하며 좋아할까 말까 망설이는 층도 빼버리고 알곡들만 모인다면, 노무현을 너무 외롭게 하는 게 아닌가 싶고. 촘촘하고 빡빡한 그물이 아니라 넓고 엉성한 그물로서 다 가지고 가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거든. 근데 다음 선거가 핫해지려면 누가 나와야 되는지 알아? 김문수하고 유시민이 붙으면 왔다야.(웃음) 둘 다 인상이 별로잖아. 그놈의 이미지선거에서 벗어나려면. 우리 사회가 한발 앞으로 나가려면 한번쯤은 그렇게 화끈하게. 서 박근혜 대세론은? 김 그 방면에 정통한 사회심리학자가 그러는데 박근혜는 한나라당 후보가 되는 순간 그 가치가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하더라구. 박근혜는 공주이고 공주는 액자 속에 있어야지.(웃음) 저잣거리에 나오면, 적나라하게 주름도 잡티도 다 보이게 된다구. 다음 선거는 한나라당만 아니면 개똥이가 나오든 쇠똥이가 나오든 상관없지 않나? 지난번엔 정동영을 뜨악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유권자들이 주춤주춤하고 있는 사이에 최악의 선택을 해버린 거고 우리는 화성 말 하는 것 같은 대통령을 갖게 된 것이고. 한 지금 조선일보를 돌아보는 소감은? 김 김영삼 대통령 시절부터 줄곧 복직 이야기가 나왔는데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가 그랬어요. 조선일보 복직돼서 사설 한 편 쓰고 그 다음날 자기 발로 걸어나오는 게 소원이라고. “지금까지의 조선일보 사설은 다 무효다!”라고.(웃음) 한 조선일보에 남은 사람들과 이런저런 정이 있을 텐데. 김 이쁜 사람은 다 나왔어.(웃음) 정태기 신홍범 성한표 등 알짜들만 나왔지. 3분의 1이 나왔으니까. 본질적으로 나왔느냐와 안 나왔느냐가 자질을 가르는 잣대는 아니었다고 봐요. 그 시점에선 사람마다 개인사와 얽힌 일이 있고 목구멍이 포도청인 문제도 있고. 단지 처음의 자유언론운동을 했을 때의 그 정신은 기자들 모두의 당연한 것이었는데 그 마음을 남아 있던 사람들이 잊고 간단하게 버렸다는 것이 가슴 아프지. 한 기자들은 언론인으로 살아야 하나요, 직업인으로 살아야 하나요? 김 난 옛날 사람이라서 밥벌이보다 언론의 사명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 적은 월급 가지고 좀 어렵게 살자 싶은 마음이 크지. 오래 고민했는데 최소한 직장으로서 한 가정의 가장의 역할에 대한 뒷받침을 못하면서 사명감을 가지라고 하는 게 어려운 일 같아. 서 김선주에게 글이란? 김 고정관념을 깨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건 그렇지 않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꼭 그게 그런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은가”라는 의문이 없으면 쓸 필요가 없다고 봐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박수만 치려면 글을 쓸 필요가 없잖아. “글이란 일종의 반동이고 불온이고 안티”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서 서울토박이로서 소위 명문 학교를 주르륵 다니셨으니까 우리 사회의 주류라고도 볼 수 있는데, 실제로는 주류인 적이 없으세요. 공직 역시 한번도 안 맡으셨죠? 김 명문은 무슨…. 내가 공직을 할 캐릭터가 아니잖아. 교통신호도 잘 안 지키고 비리가 많다고요. 무엇보다 지금 내가 하던 일보다 잘할 수 없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거기 가서 죽을 쑤겠어?(웃음) 공직 노! 부르면 조르르 달려가는 게 싫어 서 노무현 정부 아래서 이거저거 제안 받으신 걸로 아는데. 김 노코멘트. 실은 언론인의 자존심이랄까 허영심 때문이었고, 부르면 조르르 달려가거나 삼고초려한다고 감읍해서들 가는 게 싫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관이 없는 제왕이라는 ‘무관의 제왕’이라는 게 참 폼난다 싶었어. 사람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고. 언론인은 영원한 비판자여야 하니까. 그러려고. 서 한겨레 퇴직(2004년 12월) 뒤에도 글 쓰는 사람으로 현실과 싸우고, 기득권에 편입되지 않으려는 자세를 후배들이 따르려고 합니다. 롤모델. 김 언론인으로서는 절대로 헛발질 안 하겠다는 것이 나와 내 직업에 대한 최소한도의 예의지. 그것만은 내 인생에서 지키자 했어요. 그렇게 안 하면 내 젊은 날이 허무해지고, 내가 가졌던 분노와 정의로움에 대한 끝없는 목마름 같은 것도 허사가 되니까. 한 앞으로 쓰고 싶은 글은? 김 나한테도 있고 너한테도 있는 파시즘에 관해 쓰고 싶어요. 무의식적으로 우리 몸과 마음속에 체질화된, 한번도 깨지 못한 틀들에 대해. 우리 사회가 너무 억압이 많아서 개인적인 사고를 두려워하고, 안전하게 집단 뒤에 숨으려 하고. 어느 시점부터 우리 사회에 괴짜가 없어졌어요. 튀는 사람은 모두 한 보자기에 싸려고 하고. 서 그래서 오늘 대륙형 인간을 모신 겁니다. 김 대륙형 인간, 그 반대말이 뭔데? 한 털 빠지면 도로 그 구멍을 찾아 집어넣는. 서 섬형 인간이죠. 폐쇄적 범생이 부류들이 과두제 사회인 한국의 권력을 점하고 있는 엘리트들이죠. 김 나도 본질적으로 폐쇄적인 범생이겠지. 평생 붙박이별이었으니까. 떠돌이별은 붙박이별을 부러워하고 붙박이별은 떠돌이별을 부러워하듯이. 내가 이렇게 살았으니까 너도 그렇게 살라고 끝없이 자기복제를 강요하는데, 나 자신도 그러한 사회적 억압이나 내 안의 파시즘과 항상 갈등하고 있어요. 서 대륙형 인간은 소심하다! 대륙형에 섬세함이 깃들어야 온기가 있죠. 김 오늘 아침에도 여기 오면서 “직설은 5년 뒤에 하겠다”고 말하려 했는데. 너무 많은 헛소리, 너무나 적은 침묵을 했어. 이런 걸로 직설을 하다니 내가 데스크면 절대 용납 안 하는데.(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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