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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제임스 해리 하우스먼 / 임종업

등록 2011-05-18 18:52

임종업 선임기자
임종업 선임기자
“신생국가에서 오늘날 대한민국까지의 부침 동안 옆에서 큰 도움을 준 영원한 친구에게.”

1981년 7월 유엔군사령관 특별고문인 제임스 해리 하우스먼이 한국을 떠날 때 수도방위사령관 노태우 중장이 그에게 헌정한 기념패의 문구다. 신군부 세력의 융숭한 환송을 받은 하우스먼(1918~96년)은 군사정권이 수십년 지배한 한국의 배후 실력자였다.

1946년 28살 나이에 대위 계급장을 달고 한국에 온 그는 국방경비대 창설에 깊이 간여했다. 일본육사 졸업 또는 만주군 출신으로 일본제국주의 군대를 위해 복무했던 사람들을 우대한 것도 그였다. 1948년 정부 수립 뒤 이승만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어 미 군사고문단으로 잔류했다. 여순사건 당시에는 미 임시고문단 작전책임자로 활약해 나중에 ‘효율적이고 신속한’ 진압작전의 공로를 인정받아 은성무공훈장 다음가는 ‘공훈장’을 받았다. 그는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 과정에서 직접보고를 받았으며, 군부 내 남로당 프락치 혐의로 사형에 처해질 운명이던 박정희의 구명에도 간여해 훗날 5·16 쿠데타 직후 미 8군 영내에서 박정희의 ‘보고’를 받았다.

그는 1950년 6월28일 새벽 한강인도교 폭파를 지시한 인물로 지목되기도 한다. 당시 국군 9만8000명 가운데 7만4000명이 강북에 잔류한 상황이었고 다리를 건너던 피난민 500~800명이 수장됐다. 이승만 정권은 최창식 공병감을 적전비행죄로 몰아 사형시켰지만 1964년 재심에서 무죄 선고가 나면서 채병덕 참모총장한테 책임이 돌아갔다. 하지만 최창식 공병감의 미군 측 고문인 크로퍼드 소령은 채병덕한테 폭파 지시를 내린 것은 미군 장교였고 그는 국군 참모총장의 고문이었다고 증언했다.

1946년에 한국에 와서 1981년 한국을 떠나기까지 35년 동안 한국 군부를 쥐락펴락했던 그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에도 모종의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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