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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과학자는 하청업자다/ 정재승

등록 2011-05-25 21:14

정재승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정재승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대한민국 과학자들은 여름이 되면 한숨을 돌린다. 지난봄 내내 연구프로젝트 제안서를 쓰고 제출하느라 정신없었기 때문이다. 이른 겨울부터 과학자들은 짝짓기를 준비한다. ‘2~3인 협업과제 공모’에 참여하고자 동료 연구자를 찾아야 하고 제안서를 함께 써야 한다. 5명이나 10명 이상 참여하는 대형 과제에 끼기 위해서는 더욱 분주하다.

한해 동안 연구실을 꾸리고, 장비를 갖추고, 계획했던 실험을 할 자금을 모으기 위해 거쳐야 할 필수 코스다. 요즘 과제 제안서의 선정 경쟁률은 무려 30 대 1. 다들 쟁쟁한 연구실적을 가지고 있고 제안서도 화려해, 여러개 제출해서 하나라도 되면 다행인 상황이다.

교육과학기술부의 연구과제에선 자유주제보다 기획과제의 몫이 크다. 정부가 정해준, 혹은 몇몇 과학자가 작성한 과제기획서에 맞춰 연구 방향도 궤도수정해야 한다. 줄기세포가 붐일 때는 너도나도 줄기세포를 하겠다고 아우성이고, 나노가 붐일 때는 ‘내가 진정 나노 전문가’라고 우겨야 한다. ‘환경과 에너지’가 이슈로 떠오르면, 덩달아 환경 전문가들이 세상에 쏟아진다. 그들이 꼴 보기 싫은 건 자신 외엔 모두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는 것!

과제에 선정돼도 걱정이다. 교수는 대학원생들과 과제 진행을 함께 한다. 교수는 본인이 신청한 것이니 그렇다 쳐도, 대학원생들은 자신의 연구주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프로젝트에 참여해야 하고, 실험과 보고서를 마무리해야 한다. 몇년간 꾸준히 할 수만 있어도 학문 경력에 도움이 되겠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프로젝트는 해마다 바뀐다. 기업 과제라면 6개월 만에 바뀌기도 한다. 내 학생도 예외가 못 된다. 지난 몇년간 학생들의 학위논문 주제와 정부 과제를 일치시켜보려 했으나, 그게 참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구비를 쓰는 문제도 쉽지 않다. 대한민국 연구비에는 인건비, 장비비, 재료비, 기술정보활동비 등 쓰는 항목과 금액이 정해져 있다. 인건비는 전체 연구비의 몇 퍼센트를 초과하면 안 되고, 재료비는 얼마를 넘어가면 안 된다. 선진국들이 해선 안 될 것만 규정에 넣어놓고 그 외엔 모든 걸 허용하는 시스템이라면, 대한민국 예산 시스템은 정해진 대로만 해야 하며, 그 외엔 모든 것이 불법인 상황이다.

세상엔 과학자 수만큼 다양한 연구들이 존재하며, 그들의 연구비 집행 방식은 제각기 달라 획일화될 수 없다. 연구하는 데 불편함이 없어야 하는 것이 기본인데, 몇몇 부정행위를 막자고 수많은 과학자들이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부정행위자를 제대로 근절하지도 못하면서.

더욱 힘이 빠지는 것은 나이가 서른이나 쉰이나 연구자라면 평생 이 짓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연구비 걱정 없이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의 실마리가 도통 보이지 않는다. 특히나 나이 든 교수가 제출할 작은 신규과제가 많지 않다는 것도 큰 걱정이다. 정부는 나이 든 과학자들은 모두 새 연구를 시작하지 않는 줄 아나 보다.

대한민국 과학자들은 하청업자들이다. ‘주어진 시간 안에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용역과제를 수행하는 소매상’이다. 실패란 용납되지 않는다. 무조건 모든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완수되어야 한다. 그래야 국민의 세금이 헛되이 쓰이지 않았다고 공무원들은 믿는 모양이다.


만약 과학자에게 창의적인 연구 성과를 기대한다면, 그것이 국민의 세금을 제대로 쓰는 것이라 믿는다면, 과학자의 연구비는 용역비가 아니라 지원금이어야 한다. 연구할 주제와 아이디어가 뛰어나고 그것을 수행할 능력과 경험이 있다면, 그것으로 연구비가 지원되어야 한다. 연구 결과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결과가 뻔히 예견되는 연구라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과학자 대부분의 생각이다.

제안서와 결과 보고서를 쓰느라 연구를 방해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부도 과학자를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지원의 대상’으로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희망 없는 나라에서 로또 같은 연구비에 목을 매는 과학자들이 날마다 꾸는 꿈이다.

정재승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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