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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말글살이] ‘말밭’을 가꾸자 / 강재형

등록 2011-06-01 18:18

기대 밖의 성과가 나왔을 때, 우연히 찾아간 식당의 음식 맛이 훌륭하거나 값이 쌀 때, 아주 멋진 이성을 만났을 때, 예상했던 문제가 시험에 나왔을 때, 지친 몸을 이끌고 버스에 탔는데 빈자리가 있을 때, 선뜻 사기에는 부담스러웠던 물건을 이벤트에 당첨되어 공짜로 얻게 되었을 때, 어처구니없을 때… 그리고 이런 경우와 정반대 상황에서도 쓸 수 있는 표현이 있다. 그런 ‘도깨비방망이’ 같은 말이 진짜 있다면, “우와, 대박이다”? 그렇다. 이 모든 상황에서 아무 때나 쓰이는 말이 ‘대박’이란 녀석이다.

1990년대 중반에 ‘대박’을 처음 들었다. 영화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아나운서의 말 속에서였다. 내 귀를 의심했을 만큼 낯설었던 ‘대박’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다. ‘도박판이나 깡패들 사이에서 쓰던 말’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속설일 뿐이다. ‘대박’은 2002년 신어자료집을 통해 제도권에 입성했다. 시나브로 세력이 커진 ‘대박’은 드디어 <표준국어대사전>에 ‘어떤 일이 크게 이루어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의 뜻으로 등재되었다. 청소년과 일부 계층을 넘어 언론에서도 예사로 쓰이는 표현이다. 하지만 언론인이 되고자 준비하는 이들에게 “‘대박이란 말을 쓰면 피를 토한다!’는 각오로 살아라” 당부한다. 공공언어로 쓰기 적합하지 않은 비속어여서가 아니다. 말맛 제대로 살리는 수많은 느낌, 거기서 비롯한 풍부한 표현을 죽이기 때문이다. 성공, 번창, 맛있음(없음), 만족, 실망, 의외, 놀람, 기쁨, 슬픔… 이렇듯 다양한 희로애락의 감정을 단 한마디 ‘대박’으로 뭉뚱그리지 말라며 단속하기 위해서이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에서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했다. 말과 글은 곧 그 사람의 품격을 거울처럼 담아내기에 낱말의 다양한 활용은 중요하다. 빈약한 어휘는 메마른 땅이고 풍부한 어휘는 기름진 땅이다. ‘말밭’이 비옥해야 거기서 움트고 자란 열매가 튼실하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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