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형
경제부 기자
차별적 무상급식은 끼니가 아니라
자존감의 문제다 원색적 비교표다…
자존감의 문제다 원색적 비교표다…
영재교육이나 조기교육도 이제 상투어가 돼버린 요즘 육아 트렌드의 화두는 단연 ‘자존감’이다. 교육방송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옮긴 <아이의 자존감>은 두달 전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자존감을 테마로 한 육아 교육서적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우리 아이 자존감의 비밀>을 쓴 조세핀 김 교수(하버드대 교육대학원)의 이야기를 보면 아이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가장 나쁜 행동은 아이에게 굴욕감을 주는 것이다. 울며 매달리는 아기를 매정하게 밀어내는 행동이나 물리적인 폭력 등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 엄마들이 가장 잘 저지르는 실수는 비교를 통한 굴욕감 주기다. “옆집 아들은 전교 1등 했다는데” “앞집 딸은 특목고에 갔다는데” 같은 우리 사회의 ‘엄친아’ ‘엄친딸’ 현상은, 학구열이나 학업성취도는 높은데 자존감은 떨어지는 한국 아이들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좋은 예일 것이다.
열흘도 안 남은 서울지역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앞두고 ‘아이의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무상급식과 아이의 자존감이라니 다른 차원의 이야기 같지만 이 두가지 이슈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바꿔 말하면 무상급식은 단지 끼니의 문제만이 아니라 자존감의 문제다. 엄마들의 끊임없는 비교가 아이들을 열패감으로 몰아넣어 낮은 자존감을 형성시키는 습관적 요인이라면 일정 소득 수준 이하 아이들에게만 지원되는 무상급식은 시스템이 지원하는 공식적이고 원색적인 비교표다. 밥값을 낼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비교의 기준은 외모와 성적 따위의 비교보다 아이들에게 훨씬 더 굴욕적임은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얼마 전 한 친구로부터 중학교 때 문제집을 가져오지 않았단 이유로 교사에게 엄청나게 맞았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집안 형편이 갑자기 몹시 어려워져 5000원짜리 문제집 한권을 살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 돈이 없어서라는 말이 도저히 안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깜빡 잊었다”는 변명이 반복되자 화가 난 교사가 폭발했던 것이다. 친구는 말했다. “그때 내가 돈이 없어서 문제집을 못 샀다고 솔직하게 말했으면 맞지 않았을까? 맞지 않는다고 해도 도저히 창피해서 말하지 못했을 거야.” 무상급식 반대를 하는 서울시나 한나라당 쪽에서는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게 급식비 지원 여부를 드러나지 않게 시행하겠다고 말했지만 이것은 듣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결국 거짓말로 끝날 공허한 말잔치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어린 시절 비교당하고 굴욕감을 느끼며 낮은 자존감을 가지게 된 아이들은 어떤 어른으로 자랄까? 물론 자존감이 결여된 아이들이 인생에서 꼭 실패하는 것만은 아니다. 스스로를 존중하는 자존감은 없더라도 남과의 비교우위를 중요시하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남을 앞지르기 위해서 성공할 수도 있다. 물론 외양적인 성공 뒤에도 메워지지 않은 자존감의 빈곤으로 더 큰 성공만을 바라보며 스스로 행복해지기는 힘들지만 말이다.
눈에 보이는 성공이나 실패 여부를 떠나 낮은 자존감으로 스스로 불행하다는 생각에 허덕이다 보면 그 불행은 외부를 향해 투사될 수밖에 없다. <우리 아이 자존감의 비밀>을 쓴 저자가 총격 사건 뒤 해당 학교에서 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 사건도 그 하나의 예일 것이다.
인생의 시작 단계에서부터 학교라는 공적 영역에서 비교표를 만들어 아이들의 자존감을 파괴하는 건 그래서 밥값이나 복지정책만의 문제는 아니다. 훗날 이 아이들이 자라나 제 안의 불행감을 감당하지 못해 그것을 타인에게 투사한다면 그 감당은 누가 해야 할 것인가. 무상급식을 정치인이나 특정 계층의 문제로만 생각할 수 없는 이유다.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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