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형 경제부 기자
입시생 아들이 손글씨 수업처럼\
다른 무언가에 열중한다면…
다른 무언가에 열중한다면…
1990년대 중반 처음 사용하게 된 노트북 컴퓨터가 애플의 ‘파워북’이었다. 내가 선택한 게 아니라 업무상 지급받은 것이었다. 대학 들어가면서 처음 산 286 데스크톱 컴퓨터로도 문서 작업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던 ‘컴맹’ 수준의 내가 애플에 관심이나 애정이 있을 리 없었다. 그 제품을 사용하면서 지금까지 기억나는 건 딱 두 가지인데, ‘더럽게’ 무거웠다는 것과 서체가 예뻤다-영문 폰트야 말할 것도 없고-는 것이다.
‘맥북 에어’가 나올 때까지 매킨토시 노트북은 무겁기로 유명했으니 초창기 시절에는 벽돌을 어깨에 메고 다니는 기분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들고 다니는 내내 ‘차라리 데스크톱을 지고 다니겠다’는 투덜거림은 자리에 앉아 노트북의 새문서를 클릭해 날씬한 블록 모양 글자를 탁탁 치기 시작하면 슬며시 잦아들었다. 능숙한 솜씨로 매끈하게 깎은 연필을 들고 사각사각 손글씨를 써내려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대 졸업 연설에는 애플 컴퓨터 서체의 비밀(?)이 나와 있다. 잠깐 동안의 리드칼리지 시절 그는 대학가 곳곳에 붙은 포스터의 아름다운 서체에 반했다고 한다. 한 학기의 짧은 학창시절을 마치고 난 뒤 1년여의 청강생 시절을 보낼 때 그는 리드대학의 유명한 캘리그래피(손글씨) 수업을 들었다.
그는 연설에서 서체 수업을 청강할 때만 해도 손글씨에 대한 지식이 훗날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다고 말했다. 왜 아니겠는가. 손글씨와 디지털 비즈니스의 거리는 서울과 브라질 상파울루만큼이나 멀어 보이는데 말이다. 누군가 컴퓨터 전문가가 되기 위해 손글씨 수업을 듣는다면 얼마나 바보같이 들리겠는가. 다만 그는 어릴 때부터 그랬듯이 자신의 시선을 끄는 것에 빠졌고 손글씨의 아름다움에 대한 열광은 그의 미의식과 안목을 한층 더 세련되게 키워줬을 것이다. 그 결과로 그는 서체가 빼어날 뿐 아니라 디자인에 있어서 다른 동종 제품을 압도하는 ‘물건’들을 줄줄이 내놓는, 그가 말한 ‘점에서 점 잇기’로 이어진 아주 기다란 선을 그려나간 것이다.
아이패드 화면에 침을 흘리며 코끼리며 고래의 울음소리를 처음 경험했던 아이가 엊그제 피시 화면의 뽀로로 아이콘을 꾹꾹 눌러대고 가능할 리 없는 플리킹(아이폰이나 아이패드의 화면 넘기기)을 하는 걸 보면서 갑자기 마음이 싸해졌다. 아이에게 문을 열어 세상을 처음 보여준 이웃집 아저씨가 떠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스티브 잡스가 만들어낸 직관적 인터페이스로 말도 떼기 전에 디지털 기기를 익히는 요즘 아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자라날까 궁금증이 일었다.
이 아이들은 어떻게 점에서 점을 이어나갈까. 비단 스티브 잡스의 교훈을 듣지 않더라도 더 이상은 조기교육에서 특목고로, 좋은 대학에서 좋은 직장으로 이어지는 단순한 점 잇기가 결정적인 행복의 요소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됐다. 나도 성적이나 스펙보다 중요한 건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한다. 하지만 입시를 앞둔 아들이, 또는 취업준비를 하고 있는 딸이 손글씨 수업만큼이나 안정된 미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무언가에 열중한다면 과연 나는 그 모습을 여유있게 지켜볼 자세가 되어 있을까. 창의적인 인재를 원한다고 목놓아 외치는 대한민국 기업들은 외국어를 빼놓고 과연 업무 내용과 별 상관없어 보이는 어떤 관심사나 재주를 가지고 있는 젊은이를 선택할 용기나 비전이 있을까. 다음 세대의 행복을 위해서는 더 많은 점 잇기가 필요하다. 그보다 더 필요한 건 젊은 세대가 더 많은 점을 이을 수 있도록 여유있게 지켜봐 주는 기성세대의 인내다.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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