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 언론인
노을, 몇 걸음 산책, 조카와 볼뽀뽀…
남아! 이런 사치를 누려볼 참이야
그리고 ‘수모’의 시대를 준비해야지
남아! 이런 사치를 누려볼 참이야
그리고 ‘수모’의 시대를 준비해야지
그리운 남(湳)!
오늘이 소만(小滿)이야. 알고 있었니? 만물이 생장해 가득 찬다는. 나희덕은 이맘때를 “초록의 물비늘이 마지막으로 빛나는 때”라고 노래했지. 아닌 게 아니라 이즈음의 초록은 세상을 채울 만하다 싶어. 시인의 말을 다시 훔치면 “조금 빈 것도 같게, 조금 넘을 것도 같게.” 여길 지나면 너무 어둡고, 여기 못 미치면 너무 밝은 듯. 득중(得中)이야말로 극한이라는 야릇한 이치를 깨닫게 되네.
남아! 캘리포니아에는 요즘도 비가 내리니? 겨울에만 내리던 비가 봄에도 온다고, 캘리포니아 날씨가 이상해졌다고 네가 투덜거리던 게 떠올라. 네 말을 듣고, 그게 일시적 날씨 변덕이 아니라 혹시 전지구적 기후변화 조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뜬금없이 했어. 어떤 재난영화들을 잠시 떠올리기도 했고. 나야 별스런 생태주의자는 못 되지만, 후쿠시마 이후에도 핵에 대한 사람들의 불감증이 여전하다는 건 좀 뜻밖이야. 주류 언론의 게이트키핑 탓인가?
얼마 전, 3012년에는 일본에 열다섯 살 아래 어린이가 하나도 없을 거라는 신문기사를 읽었어. 지금 같은 저출산 추세가 이어지면 그렇게 되리라는 건데, 좀 한가로운 얘기로 들리더라. 천년 뒤까지 과연 인류가 살아남을 수라도 있을까? 일본인이든 아니든. 지금의 진화 속도와 방향을 단숨에 뛰어넘고 거스른 ‘신인류’가 태어나지 않는 한, ‘31세기 인류’라는 건 있을 법하지 않아. 지금도 이 행성 어디선가 아이들이 떼로 굶어 죽어가는 걸 보면 짐작할 만하지. 아이들이 죽어나가는 건 걔들을 살릴 먹을거리가 없어서가 아니잖아. 행성 다른 곳에 쌓여 있는 그 먹을거리가 그 아이들 입에 다다를 수 없도록 하는 정치 탓이지. 그 정치가 잘 관리되지 못해 단 한 번의 커다란 전쟁으로 비화하기만 해도, 인류는 가뭇없이 사라지겠지. 다른 생물들은 무슨 죄니? 외계 지성체 역을 맡은 키아누 리브스가, 어느 영화에서, 이 행성을 인류로부터 구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던 게 생각나.
보고 싶은 남!
한국 소식을 너도 접하겠지만, 그리 반가운 일은 없어.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지난달 총선 뒤로 며칠 침울했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 진심이야. 환호작약할 일도 아니었지만, 마음 상할 일도 아니었어. 그 뒤 민주당과 통합진보당 사람들 하는 걸 보면 말이지. 특히 통합진보당 사태! 지금도 출구가 안 보이네. 그사이에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은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고. 정권 끝머리라는 걸 일깨우듯,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부패 스캔들. 가끔 코믹한 장면도 있긴 하지. 수천억원대의 불법대출과 횡령을 일삼던 어느 금융인의 ‘밀항’ 시도! 어느 기자 말대로 다 죽어가던 낱말에 생기를 불어넣더구나.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은 외려 나라 바깥에서 불어오더라. 동성결혼에 대한 오바마의 지지 선언, 그리고 프랑스 대선 소식.
남아! 나잇살이나 먹었으면서도 나는 왜 이리 정치에 집착하는지. 누구 말마따나 정치는 정말 한국인의 히스테린가? 내겐 누려도 될, 아니 누려야 할 생의 정당한 사치가 수두룩한데 말이야. 서해 바다의 저녁노을, 몇 걸음의 산책(양재천이 늘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몇 마디의 밀어, 몇 모금의 에스프레소, 몇 움큼의 잔모래, 어린 조카들과의 볼뽀뽀, 몇 줄의 시 같은. 뜻대로 될지는 모르겠으나, 이젠 그런 정당한 사치를 누리려 애써 볼 참이야. 그러면서, 박근혜 시대를 준비해야겠어(결국 또 정치로 돌아오는군! 그리고 내 학습된 이 비관주의!). 박근혜 시대를 살아가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뜻이야. 그건 아마 수모(受侮) 연습, 해리(解離) 연습이겠지.
네가 사는 곳, 오렌지카운티, 이름이 참 예쁘다. 미국엔 거기 말고도 수많은 오렌지카운티가 있겠지만. 그곳엔 실제로 오렌지 밭이 펼쳐져 있니? 휴대폰에 담긴 네 사진을 가끔 들여다본단다. 고와라! 네 얼굴은 세월을 잊었구나. 나는 거울 들여다보기가 싫은데. 몸이 있는 탓에 이렇게 너와 떨어져 있어야 하지만, 몸이 없다면 어떻게 너를 만져볼 수라도 있을까? 건강 잘 챙기렴. 보고 싶어 남! 내 친구 얼굴을 만져보고 싶어!
고종석 언론인
[통합진보당 압수수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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