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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진보정당의 앞날 / 진중권

등록 2012-07-31 19:14

진중권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
진중권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
구당권파의 몽니로 통합진보당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당은 국민과 당원에게 혁신을 약속했고, 그 혁신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치가 바로 이석기·김재연 의원 제명이었다. 하지만 통합진보당은 국민과 당원 앞에서 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하다못해 ‘불통’의 대명사로 통하는 대통령도 절대다수가 비난을 하면 대국민 사과를 한다. 민주당과 새누리당이 썩었다 해도 국민 다수가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는 ‘혁신’의 흉내라도 내려 한다. 그런데 통합진보당에서만은 이 정당정치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당을 국민의 눈높이에 맞출 수 없다.” 이 말은 구당권파가 자신들의 존립 근거를 남한의 유권자에게 두지 않겠다는 결연한 선언이다. 도대체 그들은 누구의 지지를 받아 정치를 하겠다는 것일까? 이것이 이른바 ‘종북주의’ 논란의 핵심적인 물음이다.

통합진보당의 정치적 생명은 이미 끝났다. 남은 것은 물리적 생명인데, 이미 3000여명이 탈당계를 내거나 당비 납부를 거부하고 나섰다. 민주노총에서도 곧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필요하면 조직적 철수까지 감행할 태세도 보인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크게 세 가지 선택지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혁신파가 끝까지 당에 남아 당내에서 혁신을 위한 지루한 싸움을 계속하는 것이다. 사실 당을 구당권파에게 내주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범국민적 지지 속에서도 해내지 못한 그 혁신을, 과연 지지자들의 일탈과 대중의 무관심 속에서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 경우 통합진보당은 3% 남짓의 고정지지층을 기반으로 존속이야 하겠지만, 정치적으로는 존재감을 완전히 잃어버릴 것이다.

둘째는 혁신파가 민주통합당에 조직적으로 입당해 그 안에서 진보 블록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는 미국에서 진보세력이 존속하는 방식이나, 이 경우 진보정당운동은 민주당에 흡수되어 소멸할 것이 불을 보듯이 뻔하기에 선택할 만한 옵션이 될 수 없다.

셋째는 혁신파가 당을 나와 종북과 패권에서 자유로운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하는 것이다. 민주노총조차 통합진보당을 더는 ‘진보정당’으로 여기지 않는 이상, 남은 길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 진보정당을 새로 건설하는 길밖에 없어 보인다.

새로 건설해야 할 정당은 우선 엔엘/피디(NL/PD)와 같은 낡은 시대착오적 이념의 관성에서 자유로워야 할 것이다. 나아가 정치적 이견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민주적 소통구조와 정파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공정한 게임규칙을 갖추어야 한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실망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다수는 진보정당이 필요하다는 데에 동의하며, 믿을 만한 진보정당이 있다면 기꺼이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다. 문제는 이제까지 진보정당은 대중이 지지할 만한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는 데 있다.

각 진보세력은 신봉하는 이념이 각자 다르나, 사민주의 수준의 개혁에는 모두 동의할 게다. 각 세력이 공유하는 그 부분에 합의하고, 그 최저 강령의 바탕 위에 합리적 소통의 채널과 공정한 경쟁의 규칙을 갖춘다면, 등을 돌린 대중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물론 통합진보당의 참여계나 진보신당 탈당파나 또다시 당에서 뛰쳐나오는 데에 정치적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정당의 임무는 유권자의 뜻을 대변하는 데 있다. 그리고 유권자의 ‘뜻’이 무엇인지는 이미 분명하게 드러났다.

위기는 기회다. 이번 통합진보당 사태에 유일하게 좋은 점이 있다면, 처음으로 진보를 ‘자성’하게 만들었다는 데 있다. 이번 사태는 적과 싸우는 가운데 진보가 얼마나 적을 닮아갔는지 충격적으로 보여줬다. 진보의 기회는 바로 그 충격적 자성에서 나올 것이다.

진중권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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