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17일 생애 마지막으로 쓴 일기는 ‘후세 사가의 평가’로 끝난다. “7년 전을 회고하니, 감회가 깊으나 지나간 7년간은 우리나라 역사에 기록될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일부 반체제 인사들은 현 체제에 대하여 집요하게 반발을 하지만, 모든 것은 후세에 사가(史家)들이 공정히 평가하기를 바랄 뿐….” 이날은 유신헌법 선포 7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저녁에 청와대 영빈관에서는 기념 파티도 열렸다. 하지만 분위기는 무거웠다. 날로 격화되는 부산 시위 사태 때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날 밤 11시30분 최규하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심야 임시국무회의에서 단 10분 만에 비상계엄령 선포안을 가결토록 한 뒤 이 일기를 썼다.
정치인들이 ‘후세 사가의 평가’를 자주 입에 올리는 것은 당대에 주권자인 국민에게 평가를 받지 못하는 데 대한 변명과 자기 위안의 성격이 짙다. 박 대통령 역시 그랬다. 반면에 이미 지나간 과거사를 놓고 ‘후세 역사의 평가’ 운운하는 것은 속마음을 숨기는 발뺌용일 때가 많다. 식민지 침략 역사에 대한 일본 정치인들의 발언이 좋은 예다.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는 1973년 2월 의회 답변에서 침략전쟁 문제에 대해 “후세의 역사가 판단할 것”이라고 비켜갔고, 다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 역시 “침략전쟁에 대한 학설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으며, 총괄하여 침략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후세의 사가가 평가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상은 다르지만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과거사 인식 발언과 너무 흡사한 점이 놀라울 정도다.
역사는 단순한 ‘훗날’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유기체와 같다. ‘역사의 판단’이라는 레토릭 뒤로 숨어버린 박 후보의 대선 행보가 한국 정치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지 자못 궁금하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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