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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정치혁신의 과제, 형식과 내용 / 신진욱

등록 2012-10-09 19:25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지난 9월29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선 시민 수만명이 ‘노’(No)라고 쓴 손팻말을 들고 의회 앞에 모여 ‘의회 에워싸기’ 행동을 감행했다. 경찰은 곤봉을 휘두르며 힘겹게 의회를 방어했다. 다음날 스페인 일간지 <엘 파이스>가 보도한 전문가들의 분석은 한 지점에서 일치했다. 이는 단지 집권당의 위기가 아니라 대의·정당정치의 위기이며, 정치의 작동방식을 근본적으로 혁신하지 않으면 무능한 정치계급과 반정치적 시민들의 충돌은 계속되리라는 것이다.

마드리드의 드라마는 오늘날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직면한 역사적 도전의 한 장면이다. 정치학자 존 킨은 수천년 민주주의 역사를 1000쪽에 걸쳐 추적한 대작인 <민주주의의 삶과 죽음>에서 21세기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이렇게 진단했다. “지금 해표면의 물결보다 중요한 것은, 깊은 해저에 전혀 새로운 종의 생명체들이 증식하여 정치의 생태계 자체를 바꿔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신종 어류의 시민들은 정치의 근본적 혁신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큰 변화고 새로운 역사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시대적 요구가 실제로 정치와 사회와 삶의 개선으로 이어지느냐다. 한국에서도 2000년대에 급속히 증식한 시민사회의 신종 어류들이 정치의 풍경을 완전히 바꿔놓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답답한 정치현실과 삶의 불안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번 대선은 이 누적된 욕구가 정치혁신으로 이어질지를 시험하는 중요한 관문이 될 것이다.

정치혁신의 여러 과제 중 가장 피부에 와닿는 것은 정치와 시민의 관계 맺음의 방식, 즉 정치 스타일의 문제다. 정부, 정당, 정치가 주권자인 시민들로부터 단절된 성곽을 쌓았다는 불만이 팽배해 있고, 이 막힌 통로를 뚫는 것은 중요한 과제다. 하지만 소통 자체가 절박한 국민적 현안들에 답을 주진 않는다. 스타일은 형식이다. 형식으로 구현되는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놓쳐선 안 된다.

정치혁신의 내용은 정치과정의 투입과 산출 측면이 있다. 투입 측면의 민주주의란 어떤 정치적 결정으로 영향받는 모든 시민들이 그 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이 측면에서 정치혁신은 이제까지 소외됐던 계층의 요구를 집중적으로 반영하는 일이다. 산출 측면의 민주주의는 정부·정당이 추진한 정책이 사회 구성원의 필요와 욕구를 실질적으로 충족시켜주는 것이다. 오늘날 대의정치는 배부른 자들의 배만 불리고 있기 때문에 국민적 대표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고, 이걸 바로잡는 게 정치혁신이다.

이런 내용적 혁신만이 정치불신을 해소하고 대의정치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킬 수 있다. 마드리드의 의회를 에워싼 스페인 시민들은 단지 정치인과 대화나 소통이 부족해서 거기 있었던 게 아니다. 새로운 정치, 다른 세상을 약속했던 좌우의 모든 정권들이 그들의 절망스런 현실, 전쟁 같은 삶을 변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약탈적 은행자본과 투기자산, 무소불위의 기업주 권력, 집과 빚과 격차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제1의 가치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대선주자들은 너도나도 혁신을 강조하며 비전 종합선물세트를 내놓고 있다. 하지만 정치의 내용이라는 측면에서 미래의 책임을 동반하는 뚜렷한 전략적 초점이 없다. 박탈당한 국민들의 존엄을 되찾기 위해 다음 정권에선 어떤 난관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이것을 이뤄야 한다는 그 무엇이 없다. 하늘에 수많은 별을 띄우는 것보다, 땅에 과녁을 세우고 활시위를 크게 당기는 것이 사람들의 이목을 훨씬 강하게 집중시킨다. 정치의 바다에 뛰어든 작은 물고기들은 그 활시위를 함께 잡아당겨 과녁을 정확히 맞히길 원한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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